작은 불편이 지구를 살린다
홍사성/ 시인,『불교평론』주간
요즘 젊은 엄마들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일지 모르겠다. 40년 전만 해도 아기를 키우는 집에는 날마다 기저귀 빨래가 만국기처럼 내걸렸다. 육아를 해야 하는 엄마들은 이 기저귀 빨래가 큰 부담이었다. 우리 집은 두 살 터울로 아이를 낳아 길렀는데 큰애가 쓰던 기저귀를 작은애 때도 썼다. 그 기저귀는 처형네가 준 선물이었다. 여러 번 빨아 부드러워진 천이 신생아에게 더 좋다고 해서 대물림한 것이었다.
빨랫줄에서 기저귀가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지 싶다. 대략 1990년 전후로 종이기저귀가 보급되면서 아기 키우는 집에서 천기저귀가 보이지 않았다. 종이기저귀는 엄마들의 육아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휴대와 사용이 편할 뿐더러 기저귀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종이기저귀는 편의성 못지않게 적지 않은 문제를 수반했다.
2013년 기준 우리나라 종이기저귀 연간 소비량은 26억2천8백만 개나 된다. 전국의 0~2세 아기를 90만 명, 하루 사용하는 기저귀를 8개로 환산한 숫자다. 일회용 기저귀는 불에 잘 타지 않는 펄프재질인데다 배설물이 함유된 채 배출되기 때문에 분해되는 데만 150년 쯤 걸린다.
환경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저출산이 국가적 과제로 등장한 마당에 환경문제를 들어 옛날처럼 천기저귀를 사용하자고 할 수도 없고 보면 진퇴유곡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사회는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가 미덕인 시대다. 생활에 편리한 좋은 물건을 많이 만들어야 소비가 잘되고, 소비가 잘 돼야 경제도 좋아진다. 이런 생산과 소비구조는 필연적으로 대량의 쓰레기 배출로 이어진다. 문제는 편리한 소비의 잔해인 쓰레기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재앙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지난 가을 인도네시아 인근 연안에서 죽은 향유고래가 발견됐는데 뱃속에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6킬로그램이나 들어있었다. 비슷한 시기 태국남부에서 발견된 폐사한 둥근 머리 돌고래에서는 17파운드 이상의 비닐봉지와 포장재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안 앞바다에서 잡힌 아귀 뱃속에서 플라스틱 생수병이 나왔다는 뉴스(2018.11.23.)가 있었다. 우리의 편리한 생활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증거들이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지나친 편리를 줄이고 조금 더 불편을 감수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은 가급적 줄여나가야 한다. 예를 들자면 자주 씻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머그컵을 사용한다면 그만큼 일회용 컵의 소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화려한 과대포장은 환경운동 차원에서라도 줄여가는 것이 옳다.
물건은 작은데 포장은 몇 겹인 상품이 배달돼 난감했던 경험은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다.
과포장과 과소비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환경재앙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가끔 시를 쓰는 필자는 최근 『고마운 아침』이라는 단시조집을 내서 몇몇 지인들에게 보내준 적이 있다. 시집을 받은 사람들은 문자나 전화로 인사를 전해왔는데 정숙자라는 여성시인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봉투가 색달랐다.
시집을 넣어 보낸 봉투를 버리지 않고 작은 편지봉투로 만들어서 축하의 인사를 보내온 것이었다. 편지 뒷면에는 '헌 종이에 생명을!'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편지를 받는 순간 그동안 낭비한 종이며 자원에 대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율장 『소품』오백건도품에는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어느 날 궁으로 설법을 나갔다가 오백 벌의 가사를 보시받은 이야기가 있다.
설법을 들은 궁녀들이 감동해서 왕에게 하사받은 옷을 보시한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우데나 왕은 불쾌한 표정으로 "수행자가 그 많은 새 옷을 받아 어디에 쓴단 말인가?" 하며 힐난했다.
아난다는 "헌옷을 입은 형제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나누어 줍니다."고 했다. 왕은 "그러면 그 헌옷은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다. "여러군데 사용하는 보자기를 만듭니다." "헌 보자기는 어떻게 합니까?" "헌 보자기는 방석을 만들고, 헌 걸레는 잘게 썰어서 진흙에 섞어 벽 바르는데 사용합니다."라고 했다. 왕은 과연 부처님 제자답다고 칭찬하며 돌아갔다. 헌 종이로 봉투를 만든 어느 시인의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감동적이었다.
환경문제가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고 있다. 이미 사람들은 수돗물을 믿지 못해 너도 나도 생수병을 들고 다닌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기 한 줌도 사먹어야 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편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다.
생명의 원천인 환경을 지키기 위한
소비생활이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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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송광사』 2019-1월호 <조고각하>에서/ * 블로그주 : 조고각하_照顧脚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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