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계자*의 노래
강영은
나는 어느덧 지렁이처럼 거미처럼 무엇보다 지네처럼 풀밭을 지나는구나 긍정과 부정의 수많은 다리로 흔들리는 몸을 건너는구나 어둡고 습한 곳에 사는 공벌레처럼 나는 또 접이식 몸을 둥글게 말아 아침 화단가에 흩어지는 그늘을 딛고 잡초를 뽑는구나
썩기 시작한 팽나무 아래 수분이 고여 지워진 얼굴들이 웅덩이에 넘치는구나 흙탕물에 화답하는 구름은 물가로 이동하는 군대의 칼과 창, 막을 도리 없어 밤의 전화기를 붙든 어제의 안부는 거문고를 낮게 울리고 손가락이 칼춤 추는 빠르고 편협한 골짜기에서 가족이 그리운 나는 높고 쓸쓸한 가을하늘이구나
홀로 자란 대나무의 시퍼런 혀는 너무 곧아 그늘이 넓어지기 전에 병이 들고 마음 없이 풍정을 노래하는 시냇물은 때도 없이 졸졸 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머리가 하얗게 센 부추꽃 위를 空으로 젓는 내 혀는 느리고 호젓하구나
습기에 젖어 오글거리는 은둔과 회피여,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는 상념의 모습이여,
스스롤 자른 몸의 마디마디 벽이 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돌덩이가 되었으니 마음의 가장자리를 잃은 나는 일찍이 한 마리 토충土蟲일 뿐 이름을 다투며 남을 누르는 것은 벌레가 할 일이 아니어서 힘써 허공을 썰어낼 뿐
밀물과 썰물을 가지고 노는 오늘이 천국이어서 나는 다만 천국의 첩경을 대비할 따름이구나 쏟아지며 다정해지는 눈물 속에서 모든 죽음은 평등하니 어둠이 와도 한 줄 바다에 용맹을 바친 집어등처럼 나는 어두워지지 않는구나
* 물계자: 『삼국유사』제5권 피은避隱편
- 전문, 시집『마고의 항아리』/ 현대시학사, 2015년
▶ 틈새를 채우는 화해의 몸짓/ 강영은 시집 『마고의 항아리』(발췌)_ 이덕주
물계자는 전쟁에서 군공軍功이 제일이었음에도 이를 알아주지 않음도 원망하지 않고 그 이후 다른 전쟁에서 임금의 위태로움에 자신이 목숨을 다해 돌보지 못함을 자신의 불충으로 돌리고 "이미 충효忠孝를 잃어버렸는데 무슨 면복으로 다시 조정과 저자를 왕래하겠는가." 통곡하면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문고를 들고 사체산에 은거하면서 대나무의 성벽性癖을 슬퍼하며 이에 가탁해 노래를 짓고 흐르는 물소리에 의지해 거문고 곡조를 지으며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삼국유사』제5권 피은避隱편「물계자勿稽子」(역해자. 최호, 홍신문화사. 1991.)
화자가 물계자勿稽子의 심중을 "마음의 가장자리를 잃은 나는 일찍이 한 마리 토충土蟲일 뿐"으로 묘사할 만큼 극단적 처절함을 대변한다. 또한 "이름을 다투며 남을 누르는 것은 벌레가 할 일이 아니어서 힘써 허공을 썰어낼 뿐"이라며 마치 화자 자신이 그러하듯 물계자의 결곡하고 고독을 자처한 한 생을 연결한다. 화자가 극한에 처한 물계자의 결곡하고 고독한 심사에 가닿는 것은 그만큼 화자가 처한 입장이 그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읽혀진다./ 물계자의 마지막 연 , 화자는 물계자의 입장에서 물계자의 속마음을 가정하며 죽음에 임해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적극적으로 고변한다. 물계자가 은거한 후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그가 혼자 맞는 죽음은 어떠했을까? 그 통한을 상상하게 하는 문면이다. "쏟아지며 다정해지는 눈물 속에서 모든 죽음은 평등"한 것으로 죽음에 당면한 자신에게 위안을 보내는 물계자의 심사는 화자에 의해 생사마저 초월하는 의식에 젖어 고절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정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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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주 시 비평집『톱날과 아가미』에서/ 2018. 12. 21. <동쪽나라> 펴냄
* 이덕주/ 2012년『시와세계』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내가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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