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이현승
도망갈 곳이 없다
우리는 변화를 갈망했지만
결국 갈망 자체에 안주해버린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도 진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년 전 사람에게서 같은 절망의 내용을 보았을 때의
비참. 천년째의 갈증을 입에 녹인다.
전생이 있다면 왜 나는 기도의 순간에만 태어나는 걸까.
맞아. 그때도 우리는 이민이나 망명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통을 말할 때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을 즐기는 마음이다.
그렇지 않은가 포조? 블라디미르?
우리에겐 낙관 자체가 곧 절망이다.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느껴왔지만
새삼스럽게도 언제나 출발점에 있는 것이다.
무소속
더 나은 시급과 연봉으로 건너가고자 했지만
결국 떠돌이였을 뿐.
우리는 소속이 없다는 뜻에서만
여전히 자유인이며
불안은 우리의 항상심이 되었다.
유연하게 갈아타기하고 싶었지만
믿음이 없는 신앙인처럼
우리는 여기에도 없고 그 어디에도 없으며
구원도 없고 심지어 절망도 없다.
러시앤캐시
우리는 대부 씨스템으로 살았다.
끌어 쓸 돈이 얼마간 있다는 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미래란 거기 잠시 있었다. UFO처럼
대부분 믿지 않지만 마치 잠깐 놀라기 위해서만 있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건 또 팔아치울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지만
순결을 경매하는 여대생처럼
낙관이란 대개 미학적 미숙함과 추상성에서 기인한다.
두려움도 그렇다. 신체포기각서라는 말처럼
그것은 물질적이다. 새삼스럽지도 않게.
극빈의 번데기를 열고 나온 것은 극악이었다.
- 전문, 『생활이라는 생각』(창비, 2015.)
▶ 주름, 몸의 정치경제학/ 이현승의 시집(발췌)_ 이찬
첫머리로 솟아오른 "도망갈 곳이 없다"를 보라. 그것은 시인이 치러 내고 있을 헐떡이는 삶의 무게와 속살을 빠짐없이 휘감고 있는 하나의 주름이다. 우리 시대를 살아오면서 그가 마주친 잔혹한 진실은 "변화"라는 것의 "갈망 자체에 안주해 버린" 우리 모두의 패배감과 무기력이다. 그러나 시인은 제 마음 깊숙이 들어앉은 아이러니의 세계관을 통해 희미한 희망의 빛이라도 잡아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도 진화라고 생각했다"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느껴 왔지만/ 새삼스럽게도 언제나 출발점에 있는 것이다" 같은 문양들은 시인이 간신히 찾아낸 희망의 빛을 제 뒷면에서 침묵처럼 비춘다. 그러나 저 희망의 빛은 "하지만 고통을 말할 때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을 즐기는 마음이다" "우리에겐 낙관 자체가 곧 절망이다" 같은 상반된 의미와 극단적 긴장이 팽팽하게 맞선 아이러니의 언어들을 낳는다. 이 아이러니는 "낙관"과 "절망"이라는 대립물들의 부정적 종합을 통한 질적 비약을 이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 대립물들이 지속적인 투쟁 관계를 이룬다고 보는 부정변증법의 적대적 전체성(the antagonistic entirety)의 시각에서 오는 것이 분명하다. 이현승의 시편들에서 발전과 진보와 성숙이라는 계몽주의의 요양이 이념이나, 허울만 그럴듯한 속류 진보주의 담론의 색채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까닭도 여기서 온다. (……) 시인은 제 삶의 곤궁과 불안과 헐떡임에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과 처연한 마음결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알랭 바디우가 말했던 인간-동물, 곧 "극빈의 번데기를 열고 나온" "극악"으로 찌든 우리 모두의 얼굴을 바닥까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는 우리 시대 만인들의 몸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동물적 생존 본능과 경쟁심과 호승심이라는 괴물들을 읽어 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실용의 이름으로 덧칠해진 우리 시대 감성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바꾸기 위해 다른 삶-정치의 실천을 명시적으로 강제했던 2000년대 '정치시'의 입론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우리 시대 청춘들의 서글픈 세태와 너절한 감성의 한복판을 꿰뚫는 "두려움도 그렇다. 신체포기각서라는 말처럼/ 그것은 물질적이다. 새삼스럽지도 않게./ 극빈의 번데기를 열고 나온 것은 극악이었다"는 끄트머리의 문양들에 깊숙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p.63~66.(……) 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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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 비평집 『시/몸의 향연』에서/ 2019. 1. 12. <파란> 펴냄
* 이찬/ 1970년 충북 진천 출생, 2007《서울신문》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평론집 『헤르메스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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