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단상
조영화
넓기도 넓다
이 도시는
방문하기 오래 전부터
날 숙연케 한다
선조들의 희망, 자존심, 눈물이 녹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도시 곳곳마다 독립운동가들의 눈물자국이 서리어 있어
신발 신고는 걷는 것이 여간 송구스럽지가 않구나
흥구공원* 윤봉길 의사, 이곳까지 어떻게 왔을까
통한의 가슴 치며 총구를 열었으리라
이승에서 산 스무네 해
역사에서는 영원하리라
-전문, 시집『느림의 계단』中
* 중국 상해에 있는 공원. 노신공원이라고도 함, 1932년 4월 29일, 조선인 애국청년 윤봉길 의사가 일본 왕 생일과 일본군의 샹하이 점령 기념 행사 때, 폭탄을 투척한 곳.
▶ 등로주의적 삶의 서정적 이미지(발췌)_강기옥
프롤로그(일부)/ 알피니스트(alpinist)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으면 '거기 산이 있어서 오른다'고 답한다. 영국의 등반가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가 남긴 이 말은 산의 존재를 전제로 한 명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와 같은 제법 철학적인 말로 대답한다. 산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말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산악인들의 등정 방법을 아는 사람은 그 말의 깊은 의미를 이해한다. 전자와 같이 단순히 거기 산이 있기에 오른다는 사람의 등산은 능선에 난 길을 따라 비교적 편안하게 오르는 방법으로 등정주의登頂主義라 한다. 산에 오르는 그 자체에 뜻을 두기 때문에 정상에 올랐다는 결과에 만족한다.
알버트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는 이 방법을 배격하고 남이 오르지 않은 험한 길,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Moredifficult variation route)'로 오르는 등로주의登路主義적 산행방법을 개척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여 암벽과 험악한 낭떠러지를 찾아 정상에 오르는 머메리를 세상 사람은 물론 산악인들도 미친 사람이라 욕하며 외면했다. 결국 머메리는 40세가 되던 1895년에 그가 주창한 등로주의 방법으로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봉을 오르다 정상부에서 실종되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신념에 모든 것을 던진 이 전설적인 산악인을 산악계에서는 머메리즘을 개척한 근대 산악의 비조鼻祖로 숭배한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는 속담이 안전을 보장하는 등정주의에 해당한다면 등로주의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의미로 속담까지 바꾸었다. 그런 신념으로 새 길을 개척하며 오르기 때문에 한 번 오른 산일지라도 항상 미답未踏의 산으로 여긴다. '무산소 등정'이나 셰르파의 도움이 없는 '단독 등정'과 같은 모험주의적 용어도 등로주의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나라 산악인들도 이제는 생존의 단계를 벗어나 여유를 즐길 만한 문화수준에 이르러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산악인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묻는 것은 노동자에게 왜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우문愚問이며, 기자에게 왜 기사를 쓰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결례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머메리가 산행의 길을 개척하여 산의 정체를 밝혀내듯 삶의 길을 밝히기 위한 숭고한 작업인 것이다. (p. 9-10.)
겨울 등산을 할 때 나는 흰 눈이 쌓인 길을 조심조심 걸었다. 아무리 미끄러워도 아이젠을 신지 않았다. 겨울의 그 하얀 순결에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함박눈 내리는 날 우산을 쓰고 산에 오는 사람을 만나면 눈인사도 하지 말라는 시를 썼다. 그러나 이 시는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그렇게 사치스러운 서정을 노래할 즈음 조영화 시인은 '홍구공원' 주변을 조심조심 걸었다고 하더니 "도시 곳곳마다 독립운동가들의 눈물자국이 서리어 있어/ 신발 신고 걷는 것이 여간 송구스럽지가 않"다는 심경을 고백했다. 풀벌레의 생명을 존중하여 하안거에 들어가는 스님의 행위보다 더 고맙고 성스럽지 않은가? 이승에서 산 짧은 스물네 해가 역사에서는 영원하다고 선언한 축복은 시인 이전에 성직자의 모습이다.// 행동력이 앞서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안위보다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의 시를 쓴다. 문인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나 예언자로서 시대를 걱정하는 메시지는 던져야 하기에 시대의 아픔을 시로 쓰는 것이다. (p.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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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기옥 평론집『느림의 계단에서 읽는 시』에서/ 2018. 12. 26. <가온> 펴냄
* 조영화/ 1996년『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느림의 계단』, 1982년 도미, 휴스턴한국일보지사 편집위원
* 강기옥/ 시집『빈자리에 맴도는 그리움으로』『그대가 있어 행복했네』등, 평론집『시의 숲을 거닐다』등, 역사 인문교양서『문화재로 포장된 역사』『국토견문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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