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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김현수

검지 정숙자 2019. 1. 13. 20:59

 

 

    편지

 

     김현수

 

 

  시집이 십만 권쯤 팔린 시인 친구에게 편지가 왔다 며칠째인지 시를 읽지 못한다고 말한다 무엇이라도 써 보려는 의지가 한 단어 한 문장에서 멈추어 버린다고 마침내 글을 쓸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날이 있기 전까지 하나의 장면과 하나의 이글거림 하나의 처연함이 있었는데 온통 중단되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멍하니 있어 보는 것이다 관계도 금전도 사상의 투입도 정지해 보는 것이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며칠이 지난 후 무언가 들린다고 무언가 말을 걸어 온다고 답신이 왔다 바람이었나 눈빛이었나 노래였나 그도 아니면 독백이었나 한 음절씩의 받아쓰기가 시작되었다고 정답을 알지 못하는 답안지를 채워가고 있다고 그러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너와 내가 이름이 다른 것처럼 각자의 길을 걸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거기에는 눈도 오고 비바람도 불고 천둥 번개를 동반하겠지만 볕 뜰 날도 있지 않겠냐고 무명시인인 나는 꾹꾹 눌러쓴 답장을 꿈나라 우체부를 통해 부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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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회 와인페어링 <포엠포엠 라임라이트 시낭송회> 팸플릿에서

  * 2019. 1. 12(토). 오후 3시, 합정동 '상상력발전소' 3층 <EL OTRO, EL MISMO 타인, 나 자신>

  * 김현수/ 2017년『포엠포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