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39
정숙자
하늘에게 책 읽히기// 마음을 따라갑니다. 마음이 하자는 대로, 저는 시의 길도 그렇게 따라나섰습니다. 시가 자연을 말하자 할 땐 구름과 바람을, 사랑을 그리자 부추길 땐 그리움과 외로움을, 삶을 노래하자 조를 땐 고독과 고뇌를 조각했습니다. 마음 따라 파도치고 부서지며 일어섰습니다.
이제 늙고 낡은 육체가 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의 그때그때의 선택들을 돌아봅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제 나이테 안쪽의 줄기 하나가 ‘좀 더 새로운 음표를 틔워야 되지 않겠니?’ 눌렀습니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동안 너무 많이 보아왔고 들었고 견디며 겪었습니다.
종일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이나 혼자 주고받다가 산책에 나섰습니다. 물론 책을 읽으며 걷기 시작했지요. 책을 펼치면 온갖 마음이 물러갑니다. 저절로 몽유도원의 주민이 되어버리죠.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태양이 (어김없이) 땅거미를 내려 보내는 시간이면 표지를 덮어야 합니다.
이번엔 책을 덮기 전에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호~ 호~ 이게 웬 일입니까? 제 어깨 너머로 하늘도 바로 이 책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책로에서 읽은 저의 모든 도서목록을 하늘도 갖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은, 그 크고 둥근 하늘은 전체가 하나의 눈이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하늘일지라도 제가 펼쳐주지 않으면 못 읽는다, 이겁니다. ㅋㅋ.)
하늘이 그리 즐겨 읽는 줄 알아버렸으니,
제가 어찌 개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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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2018-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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