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40
정숙자
내 생애 가장 쓸모없는 짓을 한 날의 기분// 제가 하는 짓이 대개 쓸모없는 짓이지만, 오늘의 이 일만큼 쓸모없는 짓은 처음입니다. 진정 여태까지의 삶을 통틀어 가장 쓸모없는 짓을 했습니다.
내용인즉,
빨간 강낭콩 모양의 알약을 두어 달째, 한 개씩, 아침마다 먹고 있습니다. 뭐 치료약은 아니고 그냥 먹어두면 어딘가 좋다는 그런 약입니다. 일부러 산 것도 아녜요. 어쩌다 우련 만난 약이지요. 저는 일단 맺은 인연에는 충실하려는 편입니다. 이 약도 어쨌든 그래서 살뜰히 먹는 것입니다.
이 약은 낱낱이 은박지로 된 제 칸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절대로 다른 누구와도 왕래할 수 없도록 감금, 독립된 개체이지요. 그들은 각자도생 볼록볼록 투명한 지붕을 두르고 있습니다. 꼭대기든 바닥이든 손가락으로 쿡 누르면 툭 튀어나오도록 설계된 돔, 당연지사 늘 쿡-툭 해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또 이 약을 쿡 가격하기 전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어? 그동안 내가 이 약을 너무 거칠게 대한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알약을 꺼낸 자리마다 아무렇게나 찢김-터짐이 저의 아나키즘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약에게 어떤 유감이나 이데올로기로도 엮였던 적 없건만,
그간 무심했던 난폭을 뉘우쳤습니다. 문구용 칼로 집터를 동그라니 도린 후 약을 비워냈지요. 며칠이 지나자 솜씨가 늘고 아이디어도 발전했습니다. 지금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적힌 면들이 일사불란 도열해 있습니다. 약의 존재의 집 밑변만은 오리지 않고 놔둬 세울 수 있게 되었어요.
참 한심한 짓이지만,
저는 3년짜리 적금을 탄 것보다도 기뻤습니다. 감히 이 따위 무용한 짓을 누가 발명할 수 있을 것인가, 감격에 빠져들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무중력의 틈을 언제 또 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생각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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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신』 2018-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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