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빙허각
이호철
빙허각憑虛閣은 독특한 당호이다. 풀어쓰면 아무것도 없는 문설주에 기대선다는 것이다. 당시 여성이 열악한 처지를 대변한 표현이었다. 하늘이라 자처한 남정네들이 빚어낸 여성에 대한 이중 잣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위대하지만 아내는 그저 땅이라는 구조였다.
빙허각은 이 나라가 건국한 이래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실학자였다. 여자이기에 억압받아야 했던 시대의 아픔을 한글로써 알 권리를 부르짖은 선구자였다. 당대 권력의 중심에 있던 가문에서 태어나 책으로 쌓인 학식이 뒷받침되어 가능했다. 터득한 지식을 혼자만의 자산으로 여기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널리 전파하고자 기록하였다.
1939년 1월 30일자 《조선일보》 기사 제목이었다.
발견된 청규박물지淸閨搏物誌
130년 전 규중부인의 문화
천문지리, 동식물 등
한글로 장章잡은 전서全書
순조 때 완산이씨 대저大著
1939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이었다.
가정실학의 웅편거장雄篇巨章
찬연한 규수문학의 최고봉!
조선어 연구에도 공헌이 막대莫大
빙허각전서, 산락散落에서 구출간행
일제 암흑기에 황해도 장단에서 발견된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는 한 줄기 빛이었다. 아니다. 일제의 창씨개명과 한글 말살의 만행을 저지르던 판국에 나타난 우리말, 우리글의 우수성은 30년 가뭄 끝에 내린 상쾌한 소낙비였다. 동아일보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돌아보건데 우리의 과거에서 빛나고 자랑할 만한 문화의 끼처노흠이 없는 바도 아니었것만 뒷자손들의 게으름과 거촌 탓에 어느 하나 똑똑이 간직하고 전하여 내려옴이 없는 것은 일대한사이지만 그중에서도 더욱 흩이어 어즈럽고 떠러져 살아진 것으로 오늘 와서 새벽 하늘에 별보다도 더 희귀한 것이 우리의 규수문학閨秀文學이다. 례와 의를 숭상하던 이 땅에서 여성이라면 덮어 노코 한 어깨 눌리워 지내는 가운데서 그 무엇이 신통한 게 있스랴 하겠지만 그러한 가운데서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되 로락이 뛰어나 능히 뒷세상에까지 법도를 드리워 추앙됨이 있다면 이 어찌 우리로서 한갓 섣불리 자랑으로서만 끄칠 것이리오!
세상에 알려진 이로 허난설헌許蘭雪軒, 신사임당申師任堂, 이원李媛, 태교신설胎敎新說을 지은 이씨李氏 그리고 황진이黃眞伊 등 규수로서 문사에 밝은 이가 없는 바 아니었지만 후세에 전하는 것은 시부詩賦귀와 글씨줄뿐이라 너무 령성零星한 느낌이 없지 안코 모든 부문을 총괄한 의미에서 또는 실용실학實用實學을 파고 캐어 이 땅 규수문학으로서 최고봉을 지은 이로서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를 아니 들 수 없는데 이제 도처에 산락되었던 빙허각전서를 전부 모흐게 되어 불원 인쇄에 붙이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와 옛 우리문화 보고에 빛나는 새로운 탑을 한층 싸올리게 되었다.
한문과 역사학의 대가로서 국학 보존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위당鄭寅普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 빙허각전서를 발견한 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이 어른 방손인 서정만徐廷萬군과 서 군의 친구 민영규閔泳珪 군 같은 부지런한 공부꾼들이 있어 들추어낸 것입니다. 간행은 내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신조선사의 권태휘權泰彙 씨가 보고 좋다 하니 아마 활자에 옮기게 될 것 같습니다. 하루바삐 세상에 나오길 심축합니다."
또한 신조선출판사의 권태휘는 기자들에게 소감을 털어놓았다.
"빙허각전서는 조선 부인계의 최대 문화탑입니다. 수개월 전부터 간행 계획을 하여 정다산丁茶山전집과 조선 문화계의 쌍벽인 것을 세상에 발천하려 합니다. 사회의 많은 지도를 바랍니다."
빙허각전서는 3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1부 『규합총서閨閤叢書』는 5책으로 여성 백과사전이었다. 주식酒食 · 봉임縫
絍 · 산업産業 · 의복醫卜을 가정 실용에 바탕을 두고 저술했다. 제2부 『청규박물지淸閨搏物志』는 4책으로 천문지리天文地理 · 역시초목歷時草木 · 금수충어禽獸蟲魚 ˙ 복식음식服飾飮食 여덟 부분으로 나누었다. 제3부 『빙허각고략憑虛閣稿略』에는 자작시 「한글」이 실렸다. 한문 대역 100여 편과 『태교신기胎敎新記』에 발문 그리고 부친 문헌공의 묘문이 담겼다. 모두가 순수 우리글로 된 것인데 한문으로 주를 단 것이 이채로웠다.
빙허각은 일찍이 어린 시동생 서유구를 독선생으로 글을 가르쳐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라는 대작을 완성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남편 서유본이 옥사에 연루된 시숙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어려움이 닥쳤다. 도성 밖 성저십리 옥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개간으로 밭을 일구어 차茶 농사와 야채 등을 가꾸고 누에를 쳐 물레질로 비단실을 뽑았다.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사소한 일도 기록을 해 나갔다. 슬하에 4남 7녀 중 여덟이나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문학이 절실하였을지도 모른다.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빙허각전서였다. 특히 남편의 외조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빙허각은 세종 왕자 영해군寧海君의 후손이다. 시서화에 능했던 이조묵李祖默은 친정 조카다. 태교신기를 지은 이사주당李師朱堂은 외숙모이며 외사촌 유희는 『언문지諺文志』를 썼다. 빙허각은 남편이 죽자 절명사絶命詞를 지어 머리맡에 두고 사람을 멀리하며 곡기를 거의 끊다시피 하다가 열아홉 달 만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출판을 코앞에 두고 있던 빙허각전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결국 빙허각고략은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나마 규합총서는 목판본이나 필사본이 흩어져 있어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청규박물지 4책은 동경대 문학부의 '오구라문고'에 단 한 부가 존재할 뿐이었다. 오구라는 조선총독부에 몸담아 있으면서 우리 문헌 자료를 많이 반출해 간 인물이었다. 그런다고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이 되었을까.
빙허각은 내게 6대조 고모할머님이시다. 문화유산으로 남긴 전서 한 질 제대로 지키지 못한 후손이라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대고모님이 완성한 시 중에 「한글」을 만나보고 싶다. 그날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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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2018-8월호 <수필>에서
* 이호철/ 2001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소금으로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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