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시>
사라진 도서관
한정원
도서관 하나가 불탔다
목이 긴 여름밤이 장마 속에 잠겨
기억의 수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가 관장인 도서관이 매운 연기를 뿜어냈다
책들을 베껴야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꼬리까지
받침이 부러질 때까지 물고 늘어져야 했다
재가 된 구름이 검은 옷을 입고
글자의 그림자가 되어 소리 내지 못하고 흘러갔다
도사관이 불타는 것은 우주의 일
도서관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도서관이 불에 탔다
미래가 불에 탔다
혈족들이 잊혀졌다
태울 것이 없어서 앞 건물 뒤 건물 놔두고
불면의 새벽을 망치로 두드렸다
이제 어떤 문장도 어법에 맞지 않는다
입술은 바닥을 드러내고 식은 땅의
유물 속에서 침이 마른 인덱스 목록이 나왔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어서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던
요절한 남자의 차가운 이름을 켜놓고
적막이 된 신전 앞에서 구걸을 한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탔다는 말
찔레꽃도 장미도 깊고 검은 흉터를 남기고
기둥 없는 열람실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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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시학』 2018-여름호 <권두시>에서
* 한정원/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마마 아프리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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