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퇴고의 어려움/ 허영자

검지 정숙자 2018. 7. 8. 13:29

 

<권두언>

 

    퇴고의 어려움

 

    허영자

 

 

  글쓰기의 마무리는 글의 마지막 마침표가 아니라 퇴고라고 한다.

  글을 다 쓴 후에 어휘나 문장이나 구성을 다시 살펴서 고치는 일이 사실은 글쓰기의 마무리라는 것이다. 글의 완성을 위한 노력과 고민이 곧 퇴고라는 작업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퇴고는 글쓰기에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글을 고치고 가다듬는 퇴고는 글쓰기에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자신의 글에 대하여 열 번 이상 퇴고하지 않으면 발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열 번 이상 퇴고하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으며 또 열 번 이상 고친다고 하여도 온전히 만족할 수 있겠는가. 실지로 인쇄소에 넘겨져 교정 단계에서까지 퇴고하는 분을 뵌 적도 있다.

 

  퇴고 글을 완성하여 발표하기 이전이 고침이지만 발표가 되어 독자가 익히 그 글에 익숙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고치는 분들도 있다. 이는 개작이라고 하지만 전후가 다를 뿐 넓은 의미의 퇴고가 되리라 본다. 그만큼 자기 작품에 대한 책임감과 완성도에 대한 애착이 크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김춘수 선생의 대표작의 한 편인 「꽃」은 처음 발표 때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물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떄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누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라고 되어 있었는데 후에 "물상을 "몸짓"으로 "의미"를 "눈짓"으로 바꾸셨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였고 이미 대표작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쳤음에는 작자로서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독자로서 이전의 것이 고친 것보다 더 가슴에 다가온다. 혼돈 속에 놓여 있는 존재 이전의 무명들이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의 고독, 그 슬픔의 정서에 지적인 뼈대가 되는 두 어휘가 "물상"이며 "의미"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시의 내용과 정조의 견고성을 구축하는 데에 있어 이 두 어휘는 대단히 큰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의 소견일 뿐 개작된 것이 더 훌륭하다고 보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어떻든 작자가 고친 것이니 수용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짐작건대 처음 이 시를 지을 때인들 한 번에 썼겠는가. 분명히 여러 번 퇴고하고 또 퇴고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발표하였고 시인의 대표작으로 이미 자리가 굳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개작을 하였을 때는 작자로서 작품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컸으며 애착 또한 그만큼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가장 중심 의미가 되는 두 어휘를 바꾸기까지 시인은 얼마나 많이 망설였겠으며 새 어휘를 선택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이 고민을 하였을까.

  그렇게 애써 고쳤음에도 오히려 그 고침을 못마땅해하는 필자 같은 독자도 있으니 퇴고나 개작이란 글쓰기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새삼 가슴에 새기게 된다. ▩

 

 

  블로그주: 김춘수(1922-2004, 8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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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 MUNPA』 2018-여름호 <권두언> 전문

  * 허영자/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과 불꽃』『투명에 대하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