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하린_지난 계절에 읽은 좋은 시(발췌)/ 삶과 4 :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8. 6. 22. 02:16

 

 

     삶과 4

 

    정숙자

 

 

  죽기는 4가 죽었는데

  울기는 왜 3이 하느냐

 

  마땅히 4가 죽었으므로 4가 슬프고

  울기도 4가 해야 옳지 않은가

  거울 앞에 선 4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할 4가 보이지 않으므로

  아아 내가 죽었구나, 하고 비로소 울고 싶은데

  엉뚱하게도 제 얼굴을 선명히 바라보는

  눈으로 왜 3이 우느냐

 

  그렇구나. 제 삶과 제 표정을 잃어버려 제 죽음을 깨달은 '4'가

펑펑, 혹은 소리 없이 친구나 아내 자식에게 의탁해 우는 것이었

구나. 4에게 애정 깊은 3만이 자꾸자꾸 눈물 흘리는 까닭이 바로

그런 내막이었구나. 4가 제 삶과 제 얼굴이 그리울 때마다 똑같

이유를, 사랑하는 3에게 전달    , 대신 울고야 마는 것이었구

나.

 

  양치질하다가    , 거품 헹구다가 거울을 보며 쏟는 울음도 그

울 속에서 양치 중인 3이 우는 게 아니라, 그 거울 속 (보이지

않는) 4가 3으로 하여금 우는 것이었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대신 울어줄 3이 아직 남아 있어

  대신 울어줄 3들이 아직 여기 살아 있어

  4도 3들도 이따금 젖고 있어

    -전문,『시인동네』2018-5월호

 

 

   ▶ 지난 계절에 읽은 좋은 시(발췌)_ 하린/ 시인

  정숙자 시인의 「삶과 4」에는 죽음에 대한 솔직담백한 태도와 직관이 담겨져 있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후 세계를 믿고 존재의 한계 너머를 상정해서 연속적인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첫 번째 태도이고, 사후 세계를 믿지 않고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생존 시에 있었던 것들에게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두 번째 태도이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태도는 모두 하나의 공통된 추모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운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관습화된 추모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것이 가진 본질에 대해 시적으로 진단했다.

  의문은 이런 것이다. "죽기는 4가 죽었는데/ 울기는 왜 3이 하느냐// 마땅히 4가 죽었으므로 4가 슬프고/ 울기도 4가 해야 옳지 않은가". 이 물음을 통해 화자는 죽음의 순간을 가장 슬퍼할 존재는 죽은 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아아 내가 죽었구나, 하고 비로소 울고 싶은데" 움직일 수 없기에 "엉뚱하게도 제 얼굴을 선명히 바라보는/ 눈으로 3이" 울게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3'은 '삶'을 동음이의어적으로 나타낸 기표인 동시에, 죽음을 나타내는 '4'와 대비되는 의미로써 타자화 시킨 숫자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독자들은 당연한 상황을 왜 굳이 시에서 진술했나? 하고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정지해 있고, 영혼이 있다고 해도 산 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상황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다음 구절까지 읽고 나면 '아, 이런 절묘한 의미가 추모 행위 속에 자리하고 있구나' 감탄을 하게 될 것이다. "제 삶과 제 표정을 잃어버려 제 죽음을 깨달은 '4'가" 보이는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기에, "친구나 아내 자식에게 의탁해" "펑펑, 혹은 소리 없이" 우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발상을 통해 우리는 「삶과 4」에서 새로운 시적 지평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시에 나타난 추모의 방식은 '3'이 주체가 되어 하는 행위가 아니라 '4'가 주체가 되어 우회적으로 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울어주는 것은 죽은 '4'가 그들 몸속에 들어가 하나가 되어 울게 하는 것이므로, '4'는 육체의 정지 후 곧바로 소멸된 것이 아니라 "대신 울어줄 3"이나 '3들이' 살아 있는 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4」를 통해 시인은 죽음에 대한 다른 시적 지평을 열어줬다. 죽은 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능동적인 추모를 할 수 있다는 발상을 통해 살아있는 자의 슬픔은 이중성을 띠게 되었다. 언제나 그 자체로 순수한 슬픔은 진심과 진심이 만났을 때 하나의 울림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시인이 제시한 방식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이물 없이 만나는 최고의 동일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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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시학』2018-여름호 <지난 계절에 읽은 좋은 시>에서

  * 하린/ 전남 영광 출생, 2008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서민생존헌장』,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창작 안내서 『시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