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소
이령
플라타너스를 보았다
물구나무선 나무 그림자
수몰된 달의 내력, 그 오래된 기억을 깁고 있을까
바람이 호수를 밀어내면
분산된 시간들이 퀼트처럼 하나가 된다
한 번도 자신인 적 없던
숲에 가린 생을 떠올리며
플라타너스, 알몸으로 그 바람을 다 맞고 서있다
오래전, 품어온 달무리
바람의 힘으로 나무를 따라 흐른다
물결은 달의 힘을 신봉하지만
달은 소리를 만든 적 없기에
명상에 잠긴 나무 그 아래, 나도
회향廻向의 맘, 머리 숙여 가져보는 것이다
달은 어느새 나무 그림자 속에
나를 베끼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의 결과 흐름이 유순하고 온정적이다. 거친 사념의 굴곡과 충돌하며 파열음을 내던 서두 부분 시들의 잔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 강한 것을 이기는 부드러운 힘의 존재를 자각하고 있다면, 이 시인의 시가 함부로 무너지는 국면을 향해 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강한 것과 유한 것의 양면을 함께 갈무리할 수 있다면 거기 이령 시의 새로운 기력이 생성할 것이다. '물구나무선 나무 그림자'의 발견은, 이를테면 그러한 양면성의 힘에 대한 발견일 수도 있다. '회향의 맘'을 '머리 숙여 가져보는 것'은 그의 시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풍경이지만, 그러할 때에 '달은 어느새 나무 그림자 속에 나를 베끼고 있는 터이다. (김종회/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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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시인하다』에서/ 2018. 5. 20. <시산맥사> 펴냄
* 이령/ 201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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