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꿈꾸는 시인 정도전/ 최서림

검지 정숙자 2018. 6. 3. 02:42

 

 

    꿈꾸는 시인 정도전

 

    최서림

 

 

  이서국으로 들어가려면 터널로 직행하지 말고

  팔조령 옛길로 꾸불꾸불 돌아서 가야 한다는 시인이 있다.

  툭하면 한숨 내뱉듯이,

  청도 땅에 울타리 없는 집 짓고

  논밭이나 일구며 살고 싶다 한다.

 

  에덴도 역사 안의 동네였다.

  주공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땅을 나누어 준 것 역시

  뺏고 빼앗기는 역사 안의 사건이었다.

  삼봉 또한 역사 안에다 집을 짓기 위해

  역사와 피터지게 싸웠다.

 

  삼봉에겐 도가 인간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를 크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없으면 하늘도 땅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구더기 득실거리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물줄기를 바꾸어버렸다.

 

  새 집을 설계하고 새 길을 낸 자는

  시인 정도전이었다.

  운명과 맞닥뜨려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정도전이었다.

 

  복숭아꽃 천지인 청도 땅에 가면 무릉도원은커녕

  초봄부터 늦은 여름까지 농약냄새만 풍긴다.

  소 값 떨어져 음독한 친구도 있다.

  이서국도 피비린내 나는 역사 안이다.

  거기에는 삼봉이 있고, 소월과 육사도 있다.

     -전문-

 

 

  시론> 한 문장: 미래파 해체주의 시인뿐만 아니라 모든 진정한 시인은 망명자이다. 이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곳에 속하지 않는 자이다. 서정시인들도 금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할 줄 알아야 진짜 시인이다. 금 안에만 안주하여 이미 권력이 되어버린 보편적인 미만 옹호하는 자는 진짜 시인이라 볼 수 없다. 대부분의 모더니스트와 리얼리스트들은 서정시인들을 체제옹호자로만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과연 그럴까? 김소월이 체제옹호적인가, 이상화가 보수반동인가, 김영랑, 이육사, 윤동주가 그러했는가. 그들은 거짓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 문학적 망명자였던 것이다. 자칭 아방가르드를 표방한 한국의 시인들 중에는 왜 그리 보수주의자가 많은가? 미학적으로는 진보적이지 못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왜 보수적인가? 망명자가 되지 못하고 금 안에서만 안주하는가. (저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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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시인의 재산』에서/ 2018. 5. 20. <지혜> 펴냄

  * 최서림/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물금』등, 시론집 『말의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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