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발터 벤야민을 읽는 밤/ 최서림

검지 정숙자 2018. 6. 3. 02:09

 

 

    발터 벤야민을 읽는 밤

 

    최서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처럼

  왼종일 흐릿하고 눅눅한 날이다.

  반 지하에서 홀로 사는 누이같이

  시뻘겋고 푸르죽죽한 겨울날이다.

  뽀글이 파마를 한 누이는

  샐러드 바를 찾지 못해 밖에서 떨고 있었다.

  죽어서도 조문객 하나 없이

  쑥부쟁이같이 웃고 있을 나의 누이,

  처음 보는 음식이라며 연어 샐러드도 못 억었다.

  변두리서 허드렛일 하다 삭아버린 나의 누이.

  역사 밖에 부스러기로 버려져 있다.

  노동, 진보, 해방 따위의 말들이

  남의 나라 말로만 들린다

  회갑 때 못 사준 목걸이를 걸어주는 순간,

  시계탑을 향해 그만 총으로 갈려버리고 싶었다.

  이 땅의 모든 가난한 누이들을 위해

  천천히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로 바꿔놓고 싶었다.

  내 안에서 망명 중인 초로의 벤야민이

  에덴을 향해 허적허적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은 과거의 희생자들을 지금 기억해 내는 것, 그리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진보이자 발전이라고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의 역사 개념을 토대로 해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현실에서 생을 탕진한 "이 땅의 모든 가난한 누이들"을 호명하면서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노동, 진보, 해방 따위의 말들이 넘쳐나는 역사의 지평에서 소외된 채 "샐러드 바"나 "연어 샐러드' 등이 낯설어 쭈볏거리는 누이의 잃어버린 삶의 시간들, 그리고 "죽어서도 조문객 하나 없이/ 쑥부쟁이같이 웃고 있을 나의 누이"처럼 역사의 박물관들을 돌아보면서 시인은 과연 역사란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반 지하에서 홀로 사는 누이"와 같이 역사의 지평에서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 수많은 민초들의 이름을 호명하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리하여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발전이라는 관념에 도달하게 된다. (황치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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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시인의 재산』에서/ 2018. 5. 20. <지혜> 펴냄

  * 최서림/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물금』등, 시론집 『말의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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