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甁
정숙자
깨끗한 병들을 나는 좋아한다
집이 좀 넓다면 내버린 병들을 지금도 데리고 있었을 것이다
병들은 하나같이 중심이 잘 잡혀 있다
흰 병, 푸른 병, 갈색 병, 노랑 병 모두 비틀거리지 않는다
넘어지더라도 당당하게 뒹군다
긁히거나 조각났을 때조차 반짝인다
그들은 뚜껑을 닫아도 캑캑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병…' 하고, 자신의 출생을 시원하게 발음한다
손, 발, 눈, 코, 귀, 이빨, 날개… 펄럭이는 육체가 안으로 다스려진 몸
텅 빈 속마저 누구에게든 내어줄 자세가 심플하다
그들은 진화를 꿈꾸지도 않는다
병 바깥에만이 역사가 떠돈다
병들은 이미 제 안에 세계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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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3년 1-2월호
* 정숙자 /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이 화려한 침묵』『감성채집기』『정읍사의 달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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