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세 자진납부
정숙자
민들레꽃 얼비친 얼굴들이 차례를 기다린다
오늘, 마감일을 놓치면 안되는 거다
이 땅에 뿌리내린 풀뿌리치고
토지세! 비껴 설 줄이 있던가?
우린 네 식구에 스물두어 평
한앞에 5평 남짓 지구를 그리어 가진 셈이다
십몇만 몇천몇백 원…
팡팡팡 수납인 찍히는 소리와 함께
햇빛 같은, 모래알 같은, 흘리지 않은 눈물 같은
거스름 동전들이 주머니 안에서 나를 만진다
어제, 그제, 요 며칠 사이
진달래 · 개나리 · 벚꽃 · 나순개 · 앵두나무도
제 터수에 꼭 맞는 토지세를 내고들 섰다
노랑 · 분홍 · 하양 · 보라 · 빨강…
구름장 몽땅 풀려버리게 이마를 묻고 울고 싶던 날
벙어리저금통에 툼벙툼벙 던져 넣은 말
짐승들의 피 같은, 숨결 같은, 눈 같은 꽃들
벽돌담, 보도블록 틈새에서도 성심성의
납부기한 어찌 알았누?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이름은 한 두름 식물일 수밖에 없다
애써 얻은 사랑이든, 고요든, 웃음소리든
지로용지 보이면 기한 내 자진납부
그리고 또 눈보라의 희디흰 이빨 속에서
다음 꽃 공그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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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학회 시제》2000년 6월
* 정숙자 /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이 화려한 침묵』『감성채집기』『정읍사의 달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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