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뱀의 기억
정숙자
학교가 도시락 거리는 아니었다. 언제라도
집점심 먹고 다시금 걸어서 학교로 갔다
밀 이삭 비벼서 후후 까먹고
겨울이면 생고구마 한입씩 베물어 발라먹고는
끼짓 껍질이야 제기차기로 날려버리며
매양 혼자서 학교로 갔다
우리집은 전설같이 따뜻한 동네 끄트머리 집
숲과 무덤과 새소리 푸른 황톳집
노랫말도 깽뚱하게 고쳐 부르며
사뿐사뿐 학교로 갔다
왕골풀꽃, 보리잠자리, 무너지는 털구름토끼
그 날도 나는 비석날 넘어 밭두둑길 가고 있었지
땡볕 퍼붓고 잡풀들 막 자라 훈둣했는데*
니은字로 일어선 뱀 한 마리가
쓰으윽 나타나 내 눈에 꽂혀…
숨도 못 쉬고…
냅다… 냅다 뛰었네
불길로 내리달리며 휘뜩 돌아봤을 때
그때도 놈은 시퍼렇게 날 쫓고 있더군
그러나 그쯤은 병풍 속 병아리였어
나이 보탤수록 놈보다 섬뜩한 놈
직립 보행하는 긴즘생 도처에서 맞닥뜨렸네
세상은 어디라없이 칙칙한 꿀척* 아닌가?
"안녕?" 손도 잡으며 이제사 곧잘 웃지만
오래도록 나는 잠을 못 잤지
그렇지만 그런 옹이도 패옥 같은 이력이란다
그만큼 풋풋했던 나, 무구한 하늘 거기 있으니-
-전문-
* 훈둣하다: 무성하게 자란 풀 따위를 이르는 전북 김제 지방의 사투리
* 꿀척: 매우 구석진 곳을 일컫는 전북 김제 지방의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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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1999년 4월호
* 정숙자 /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이 화려한 침묵』『감성채집기』『정읍사의 달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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