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언어여
이승훈(1942-2018, 76세)
언어는 고향이 없습니다 오늘도 고향에서 쫓겨납니다 지금 내가 하는 꽃이라는 말도 꽃에서 쫓겨나고 바다라는 말도 바다에서 쫓겨나고 언어는 유랑민 남의 나라에 삽니다 언어는 계속 추방되고
그러나 이 언어가 없다면 난 당신을 만날 수 없고 당신을 사랑할 수 없고 물론 사랑이라는 말도 고향이 없습니다 사랑도 떠돌이, 망명객, 사랑도 몸 붙일 곳이 없지만 이 언어라는 유민, 떠돌이, 사막, 표류가 문지방입니다 이 문지방에
당신이 있고 내가 있고 황혼이 있고 떠돌이 언어여 넌 내 친구 너 때문에 나를 기억하고 나를 망각하고 내가 글을 쓰는 건 나의 망각, 나의 망명, 나의 추방 왜냐하면 떠돌이 언어여 네가 나이므로
지금 이 종이에 쓰는 것도 잠시 나를 잊는 것, 매장하는 것, 곧 모래바람이 불리라 매장의 환희여 오늘도 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나를 매장하고 다른 나라로 떠납니다 술을 마시고 지는 해를 봅니다 이 땅에 이 종이에 이 아스팔트에
파묻히는 나를 봅니다 떠돌이 언어여 네가 사유하고 망명이 살고 추방이 살고 유랑이 살고 이 유랑 속에 떠돌이 나여 길바닥에 비치는 저녁 햇살이여 언어가 말합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다오! 오오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오늘도 언어가 펄럭입니다
- 이승훈 시집 『인생』<민음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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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표현』 2018-4월호 <시인이 추천한 근작 발표시_김상미 추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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