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이경수_거리, 들끓는 청춘의 공간(발췌)/ 기억할 만한 지나침 : 기형도

검지 정숙자 2018. 4. 12. 01:50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1960-1989, 29세)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길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문-

 

 

   ▶ 거리, 청춘들의 들끓는 공간(발췌) _ 이경수

  도시의 거리를 거닐던 시간이 없었다면 '기억할 만한 지나침'의 순간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시적 주체는 "눈을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던 어느 날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눈을 뒤집어쓴 건물들이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가던 그 시간, "무슨 관공서"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거리를 지나가던 시의 주체에게 "유리창 너머"로 "한 사내가 보였다". 그는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느낌표(!)를 찍을 만큼 울고 있는 한 사내를 목격한 일은 시의 주체에게 충격적인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 사내는 이 어두운 눈 오는 거리에서 누군가 자신의 울음을 목격했으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사내의 울음을 목격한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따나지 못했다".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의 울음을 "중지시킬 수"도 없었다. 그저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 머물며 가만히 지켜보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홀로  울고 있는 그 사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내의 울음을 통해 시의 주체는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내의 고독과 절망을 읽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의 주제가 느끼는 고독과 절망을 마주한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낯선 사내와의 마주침을 통해 시의 주체 안에 있었던 울음이 터져 나온 순간과 그렇게 '나'는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사내의 울음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그의 울음이 멎을 때까지 가만히 그를 지켜본 것이다. 그것은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 지금 우연히 "그를 떠올리게" 된 것도,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 뒤늦은 고백을 한 것도 그 사내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고독한 울음이 터져 나오는 그 순간으로부터 희미한 희망의 빛이 시작됨을 이미 기형도 시의 주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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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산문학』 2018-봄호 <기획특집1 · 거리, 들끓는 청춘의 공간> 에서

  * 이경수/ 1999년 《문화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저서『불온한 상상의 축제』『이후의 시』『너는 너를 지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