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전문-
* 이 시의 매력은 굴종의 자세를 그대로 항거의 자세로 뒤바꾼 데에서 나온다. 형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로 아래로 향하던 힘이 그대로 위로 솟구쳐 오른다. 굴종의 노역이 지고 있는 무게를 그대로 항거의 에너지로 변환시킨 것이다. 그렇게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가 된다. 나무는 항상 꽃 피는 나무이다. 꽃 지고 있을 때조차 그렇다. 다시 말해 나무는 이미 솟아오르는 나무이다. 꽃 지고 있을 때조차 그렇다. 이 시의 대중적 매력은 그러니까 가장 연약할 때조차도 가장 강한 에너지를 내장한 것으로 느끼게끔 하는 데 있다. 그것이 형상의 불변성을 바탕으로 한 벡터의 역진이 자아낸 효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적인 반전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그것은 제 10행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라는 부정어 단 하나이다. 마지막 네 행을 실질적인 결어로 간주한다면, 제10행은 이 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중심점이다. 이 중심점이 곧 반환점이 되어 부정적 세계를 긍정적 세계로 돌변시킨다. 희한한 도상 거울이다. 의혹의 감탄사를 두 번 외치니 세상이 통째로 바뀌었다./ 현실이 이렇게 반전하는 경우는 없다. 언어가 그런 믿음을 줄 수도 없다. 그런데 현실의 좌절을 보상하는 게 언어의 기능인지라(그래서 언어는 꿈이다).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언어에 바라기가 일쑤다. 이 반전은 그러니까 사람들의 소망을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언어의 보상적 기능을 최대한으로 과장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언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버린 것이다. 언어가 현실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그 한계를. 언어가 현실을 대체한다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광태 속에 빠져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p.p.p.94.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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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과리 비평집 『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에서 / 2014. 10. 6. <(주)문학과지성사> 펴냄
* 정과리/ 1958년 대전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1979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조세희론」으로 입선하여 평단에 나옴, 저서 『문명의 배꼽』(1998), 『무덤 속의 마젤란』(1999),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2005) 외 다수, 현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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