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이관일_깔끔하고 고결한 성격이었지만...(발췌)/ 나는 왕이로소이다 : 홍사용

검지 정숙자 2018. 2. 14. 16:23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1900-1947, 47세)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지요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빨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스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섦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무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흘 날 밤, 맨재텀이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 가다가 건넛 산 산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좇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에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전문-

   

  깔끔하고 고결한 성격이었지만 너무 가난해서_ 이관일

  홍사용 시인은 재정이 어려웠던 '토월회'의 재정 지원, 임시정부 지원, 문예지 발간과 신극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일깨우겠다는 의지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홍사용 시인 개인으로서는 너무나 참담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천석지기를 다 탕진해 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1930년 무렵부터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전국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을 돌보지 않고 예술운동을 한답시고 가산을 탕진한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다 폐렴으로 병약한 몸이 되어 가까운 지인들조차 그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홍사용 시인은 늘 청빈한 생활 속에 깨끗하게 지조를 지켜 왔지만 가난 앞에선 아무 것도 지킬 수가 없었다. 생활고 때문에 한의사가 되어 약방문을 쓰기도 했으며 옛 동료들을 찾아 생활비를 얻어 생활하는 등 '깔끔하고 고결한 성격'의 홍사용 시인 역시 가난 앞에서는 참으로 무력했다./ 이런 홍사용 시인에 대해 조지훈 시인은 "눈 감으면 몇 십 년을 하루같이 흰 모자에서부터 흰 신까지 신고 다니던 그 깨끗한 모습, 술은 마실수록 더욱 조용해지고 날 샐 무렵까지 앉은자리에서 벽에 한 번 기대지도 않던 그 단정한 모습, 불기不夔의 민족감정 때문에 글 쓸 자리를 고르다 못해 남 먼저 붓을 꺾고 만 그 정신이 역력히 살아온다"라고 했다./ 이처럼 홍사용 시인은 항상 청빈한 생활 속에 지조를 지키면서 살았으며 출판과 극단 운영에 가산을 탕진하고 적빈赤貧속에 삶을 마쳤다.

 

    ---------------

  *See』2018-1월호 <홍사용 시인 "단 한 줄 단 한 자도 친일작품을 쓰지 않은 진정한 항일시인">에서

  * 이관일/ 본지 편집스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