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이경철_백척간두에서 일군 공(空)과 적멸의 시학(발췌)/ 낙화 외 1편 : 이형기

검지 정숙자 2018. 2. 11. 19:28

 

 

    낙화

 

    이형기(1933-2005, 72세)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전문-

 

 

  백척간두에서 일군 공과 적멸寂滅의 시학_ 이경철(문학평론가, 시인)

  1950년, 나이 17세로 등단, 최연소 등단의 시재詩才를 자랑했던 그가 20대 초반에 쓴 는 우리 현대시 110년사에서 절창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시이다. 지금도 권력이나 뭐에 집착해 못 떠나는 꼴불견들을 두고 자주 인용되는 시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의 아픔을 단호한 결별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연애시로도 읽히는 이 시에는 불교철학이 내장돼 있다. 대학에서 불교학전공한 이형기 시인의 시에는 공과 적멸의 미학이 담겨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려는 치밀하고 단호한 부정의 방법론이 담겨 있다./ 이형기 시인은 항상 '부정하라', 전복하라'를 강조했다. "시란 본질적으로 구축해놓은 가치를 허무화시키는 작업이며 시에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 당나라 장사 스님의 게송으로 목숨 건 수행을 독려하기 위해 선가에서 하는 말이다. 일반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이 시인이야말로 6·25의 폐허에서, 아니 우리네 실존의 늪에서 항상 백척간두에 올라서 모든 걸 부정하며 자신과 세계의 본질, 불도佛道와 한몸이 되려 한 시인이다.

 

 

    절벽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전문- 

 

  뇌졸중으로 투병하던 그가 말기에 쓴 <절벽> 전문이다. 실존의 결단이 육화되어 감동이 온몸의 전율로 오는 시이다. 이 시를 표제로 한 시집 서문에서 이형기 시인은 "모든 존재는 필경 티끌로 돌아간다.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영광스럽게 노래하는 존재는 시인이다"고 했다./ 티끌로 돌아가는 유한성을 백척간두에 서서 '영광스럽게' 노래할 수 있는 시인에게 유한과 무한, 유와 무, 색과 공 등의 분간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백척간두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방세계와 한 몸이 되어 간 시인이 이형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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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평론』2017-겨울호 <특별 기획|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 ③/ 한국 시단에 전방위로 배어든 불교>에서

  * 이경철/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10년 『시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저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미당 서정주 평전』등,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