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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르네상스와 성숙한 문화의 장/ 김윤정

검지 정숙자 2018. 2. 8. 02:15

 

<특집 | 셀럽작가 전성시대>

 

 

    시의 르네상스와 성숙한 문화의 장

 

    김윤정 / 문학평론가

 

 

  1.셀럽시인들의 전성시대

  최근 들어 시의 르네상스 셀럽(셀럽은 celebrity의 약자로 유명인사, 명성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요즘 '유명인사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셀럽은 연예인을 비롯하여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양한 직종의 인사들을 포괄한다. 일종의 비연예인의 스타화를 떠올리면 되겠다. 언론인 손석희, 전 정치가인 유시민, 소설가 김영하, 영화평론가 허지웅, 스타 강사 설민석이나 최재기 등이 오늘날 셀럽 지식인으로 꼽히고 있다.)시인들의 전성시대라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시가 대중성을 띠면서 시집의 판매부수가 늘어나고 그와 함께 대중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시인들이 대두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유명세를 타는 시인들은 마치 연예인처럼 TV프로그램이나 각종 문화 이벤트에 출연하여 대중과의 소통을 꾀한다. 이때 시인들에게 던져지는 시선은 대중이 연예인을 바라볼 때와 다르지 않다. 연예인을 바라볼 때의 신비감과 경외감, 그리고 소통의 행위에서 오는 재미와 유쾌함 등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것, 시인도 대중의 욕구를 한몸에 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문화 권력의 한가운데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부르디외는 문학작품 역시 생산과 수용의 사회적 조건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산물 중 하나로 간주한다. 심미적 체험과 자율적 속성이라는 독특한 기제를 지니는 문학은 그에 따라 사회와 역사를 초월한 채 창조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놓이는 사회의 집단적, 제도적, 사회적 관계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은 자체 내 미의 질서를 절대적 원리로 지님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사회적 제도 속에서 실재한다. 외재적으로 보았을 때 문학은 제반 사회 경제적인 관계 속에 위치지워지는 제도화된 가치의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오늘날 시인을 셀럽이 되게 하는 사회 경제적인 관계는 무엇인가? 물론 우리는 시인이 사회의 중심에서 시대를 이끌어가며 지도자적인 역할을 행하였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1970년대 시대의 진두에서 민주화 실천을 행하였던 시인들은 사회의 지도자이자 정치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많은 지식인들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시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많은 시민과 지식인들의 관심이 모이는 지대였고 또한 이들의 의식을 형성하였던 주요 가치였다. 이 시대에 시인은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셀럽시인들의 영향력을 말할 때 우리는 1970년대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이야기해야 한다. 오늘날 영향력을 끼치는 시인들이란 과거의 고급문화, 엘리트문화와 다른 소위 대중문화 속에서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197,80년대의 시인들의 영향력이 지식인 혹은 엘리트들 사이에서 행사되는 것이었다면 최근의 셀럽시인들의 유명세는 철저히 대중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다. 사실상 시인들의 셀럽화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에서의 대중화된 권력의 양상을 띤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점 때문에 셀럽시인들의 대두는 문학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대중화된 문화 속에서의 권력이 되어 버린 셀럽시인들의 권위를 문학이 본질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얼마만큼 승인을 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2. 셀럽시인들의 탄생과 문화 권력

  문화의 권력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는 매체일 것이다. 매체의 비중은 곧 그에 의존하는 콘텐츠 및 그것을 생산하는 주체의 영향력을 결정짓는 주된 요인이다. 동시에 매체는 시대와 나란히 존재하면서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자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와 지금의 2010년대의 매체의 지형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하며, 이때의 차이가 문학의 성격에 있어서의 질적 차별성을 야기할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유추가능하다. 말하자면 인쇄매체가 사회와 문화의 중심에 놓이던 시대와 영상 및 전자 매체가 그 중심에 놓이는 시대의 문학을 둘러싼 제도적 결정성은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지식인이 어떤 존재로 세밀하게 위치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거니와, 셀럽시인들의 탄생의 시기에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환경의 변화는 곧 인터넷 매체의 결정성이다. 단순히 하나의 도구로서가 아닌 세계 자체가 되어버린 인터넷 환경으로 인해 사회에서의 권력의 질서는 급격하게 재편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인터넷 매체는 여러 제도의 층위들 가운데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주도적인 지위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의 르네상스와 셀럽시인들의 등장, 그리고 그들이 문화의 새로운 중심이자 권력이 되어가고 있는 현상은 바로 인터넷 매체가 제도의 중심에 놓이는 데서 비롯한다.

  셀럽시인으로서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될 수 있는 이들은 단연 댓글시인 제페토와 SNS 시인 하상욱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시로써 댓글을 쓰며 공감대를 형성했던 제페토와 도시인들의 소소한 일상을 바탕으로 촌철살인적 글귀를 행사하는 하상욱 시인은 유명세를 타면서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제페토가 여전히 익명으로 있다면 하상욱은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여 자신이 모습을 널리 드러낸 바 있다. 하상욱은 대중에게 시와 시인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시키면서 당당히 제도의 한가운데 자리잡았다.

  셀럽시인인 이들의 존재를 보면 오늘날 시집의 출판과 판매를 유도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라기보다 이미 민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사전 유통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블로그를 통한 콘텐츠 관리와 각종 SNS를 통한 시 텍스트의 확산이 시집 출판 및 판매를 결정하는 커다란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페토'가 7년간 자신이 블로그에 쓴 120여 편의 시를 모아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한 경우라든가 하상욱이 자신의 SNS에 올린 시들을 바탕으로 『서울 시』시리즈를 출판하고 있는 경우 이들 시들은 출판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요컨대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시가 대중화되는 최적의 유통 경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시의 르네상스 현상 역시 시라는 장르가 인터넷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가령 대중의 취향에 잘 들어맞는 시들은 블로그나  SNS에서 '퍼오기' '퍼가기'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당한 길이와 심미성을 지닌 시 장르는 블로그를 장식하는 데 매우 안성맞춤이다. 순간적으로 정서에 작용하는 시는 이웃을 끌어모으는 데 있어 블로그의 주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인터넷 대중 역시 자신과 공감대를 이룬다고 판단되는 블로그들을 일상의 한 공간으로 활용함에 따라 블로그들은 시가 안정적으로 소통되는 통로 구실을 하게 된다. 따라서 잘 관리되는 블로그는 수많은 이웃의 방문을 받으면서 대중성을 확장시켜 나가며, SNS 상에서 늘어나는 팔로워들의 수 또한 대중성을 보장하는 지표가 된다. SNS에 올려진 하상욱의 시들에 공감하는 팔로워들의 숫자는 그의 시를 성공시킨 이유의 전부라 해도 틀리지 않다. 이처럼 이웃과 팔로워들의 숫자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포스트한 콘텐츠의 판로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웃과 팔로워들의 규모는 곧 불로거나 에디터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는 상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의 장소가 된다. SNS는 개인이나 중소기업처럼 TV광고나 포털사이트의 광고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유용하다고 알려져 있다. SNS에 자신의 상품을 알리고 이를 판매의 루트로 삼는 일은 오늘날 흔한 일에 속한다. 인기 있는 파워유저라면 SNS에서의 마케팅 활동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SNS는 상품 판매를 위해 매우 중점적으로 고려되는 매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SNS의 소통 메카니즘은 지적 콘텐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SNS 상에서 소통되는 콘텐츠는 비단 물적 상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매우 사적인 경험에서부터 개성적인 단상, 시나 웹툰, 소설과 같은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을 포괄하거니와, 이들 콘텐츠들은 광케이블의 복잡성과 속도만큼이나 복잡하고 빠르게 자신의 활로를 전개해나간다. 언어와 운영 체계가 가로막지 않는 한 이들 콘텐츠들의 소통을 막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는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 자체가 권력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인터넷 상에서 콘텐츠가 소통되면서 우리는 그것을 중심으로 한 힘의 이동과 형성을, 권력의 흐름과 집중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파워 블로그나 SNS 상의 파워 유저의 계정들이야말로 인터넷 시대의 문화 권력에 해당됨을 말해준다. 인터넷 상의 파워풀한 계정들이야말로 새로운 문화의 발원지이자 시대를 이끌어가는 문화 리더들인 셈이다. 네트워크상에서 부여되는 권력인 까닭에 그것은 리더와 팔로워 사이의 밀착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블로거와 이웃들, 에디터와 팔로워들은 자신들이 취향을 매개로 초밀착 관계를 이루며 네트워크의 두께와 속력에 준거하여 확장된다. 인터넷을 통해 형성된 권력이 초권력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한 이 점은 대중성이 큰 블로거나 SNS의 콘텐츠가 문화유통업자들에 의해 주목받게 되는 이유를 말해준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적 속성에 의해 형성되는 이와 같은 소통의 메카니즘은 오늘날 문화 권력의 지형적 특성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문화 권력은 그것이 판매 부수와 인지도와 같은 제도적인 지표로 결정되는 한, 특정 지식인의 독창성이나 시인의 예술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형성된다. 대중의 정서와 취향, 대중의 호감도, 대중의 선택은 오늘날의 문화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며 유통시키는 가장 주된 요인이 된다. 그 힘이 문화 시장에로 고스란히 연결된다는 점에서 문화 권력을 결정짓는 요인은 대중인바, 이러한 대중이 빛의 속도와 확산도를 지닌 매체와 결합됨으로써 그들은 오늘날 초권력의 존재로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시의 르네상스와 셀럽시인들의 등장은 초권력의 존재로 부상한 대중의 호명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의 문화적 지형이 197,80대와 얼마나 다른지 새삼 느끼게 해준다. 인쇄매체가 매체의 중심을 이루던 시대에 매체는 대중과 상당한 간격 아래 놓여 있었던 반면 이들 매체에의 접근성이 원활했던 지식인들이야말로 문화의 중심 존재에 속하였다.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문화의 제도적 권력을 형성하는 이들은 단연 지식인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문화를 이끌어갔던 권력에 준하여 우리는 지식인들에게 권위를 승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매체와 밀착되어 있는 주체들인 대중들에게 우리는 어느 정도의 권위를 승인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문화 권력의 질서를 얼마만큼 용인하고 있는가?

  오늘날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대중의 의미는 보다 포괄적이다. 이는 과거 엘리트와 대중이 구분되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차이가 뚜렷했던 시대에서 통용되던 '대중'의 의미와 오늘날의 '대중'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대중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고 말해도 무방하며 나아가 언어의 경계가 없는 한 전세계 시민을 포괄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 속에서 과거 지식인과 대중들을 가름하던 지적 수준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대중은 모든 피플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대중을 과거에 그러했듯 배운자와 못배운자, 이성과 감정, 남성과 여성, 지성과 감각, 성숙과 미성숙 등의 기준으로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들 대중들은 이리저리 뒤섞이고 이리저리 휩쓸린 채 예측불가능한 이동경로로써 흐름을 만들어낸다. 대중들은 때로 사회에 비판적인 이성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 가볍게 웃고 즐기는 유쾌한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한없이 정서적이고 남만적인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냉정하게 득실을 따지는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대중들은 단일하게 고정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매순간 형태를 달리하는 유동적인 존재로 현상한다. 그들의 선택은 아메바의 변화와 움직임만큼이나 불확정적이다. 대중들의 이동과 흐름에는 어떠한 공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문화 시장이 인터넷 상의 대중들의 움직임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날 문화의 지형도는 대중이 보여주는 이같은 불확실성이 확정하기 때문이다.  

 

  3. 문화의 장과 그 성장

  인터넷 매체가 형성하는 이와 같은 권력의 메카니즘을 본다면 지금의 셀럽이 내일의 셀럽으로 보장될 수 없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권력의 중심이 대중인 시대에 순전히 대중에 의해 선택된 셀럽의 권위는 오직 대중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다. 셀럽은 대중이 호명하는 한에서 셀럽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적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를 떠올린다. 고믄 권력은 대중들로부터 비롯된다. 문화 권력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과거의 대중문화의 저급성을 떠올리며 오늘날 대중에 의해 부과된 문화 권력을 제아무리 외곽으로 밀쳐내려 해도 떠밀리는 것은 문화 권력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시도를 행하는 이들이다. 문학의 고유성과 본질적 가치를 내세우면서 시장의 유통 질서와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의 권력을 보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사회는 이미 문화를 둘러싼 제도화의 메카니즘을 구축하고 있으며 문학이나 시 역시 이와 같은 객관적인 승인 제도 내에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나 제도에 의해 승인된 권력은 영원할 수도 절대적일 수도 없다. 자율성과 창조성을 내재적 속성으로 지니고 있는 문학은 외재적 권력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하는 거점이 된다. 시인들은 문화 권력이 된 시의 개념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새로운 시의 정의定義를 구현하고자 하는 존재들이다. 시인들에 의해 새로이 정립된 시의 개념은 기존의 시의 문법을 넘어서는 역동적인 실체로 작용한다. 이와 관련하여 부르디외는 문학과 예술이 일으키는 '문화 투쟁의 장'으로 설명하고 있다(현택수,「문학예술의 사회적 생산」,『문화와 권력-부르디외 사회학의 이해, 나남출판, 1998,p.27.』 ). 부르디외는 문화의 장이 자본의 분배구조에 의해 위계화 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대량생산의 하위장'과 '제한생산의 하위장'으로, 자본의 독점자들과 이에 맞서는 자들로,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과 '대중을 만들어야 하는 작품'으로, '부르조아 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위의 글, pp.27.28.). 이때 이들의 하위장들은 고정불변한 채 자신의 지위와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힘의 관계 속에 놓인 채 권력의 위계 질서를 재편성하려 든다. 가령 각각의 하위장들은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로, 자본주의화된 예술과 반자본지향으이 예술로 영원히 구분된 채 정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문화의 정의定義를 둘러싼 알력 관계 속에 놓이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부르디외는 문학의 장을 작가에 대한 '정의내리기' 싸움터(위의 글, p.30.)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적인 것'과 '비문학적인 것'의 차이는 단지 '정의내리기' 또는 '경계선 설정'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무엇이 문학작품이고 아닌가 하는 것은 그 사이에 경계를 짓고 이를 제도화하는 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위의 글, p.22.).

  부르디외의 '장' 개념은 권력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문학 내에서의 갈등과 투쟁의 양상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것은 작가들 자신이 지향하는 문학의 본질과 가치를 둘러싼 치열한 힘들의 겨루기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각각은 말 그대로 하위장들인 채 위계화되면서 동일하게 문학의 가치와 본질을 입증하기 위해 상승하려는 존재들이 된다. 이들은 동일하게 궁극의 지위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얻게 되는 하나의 결과가 곧 제도화와 권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영원히 권력과 무관한 하위장도 영원히 권력을 지속하는 하위장도 없음을 의미한다. 장은 권력을 향한 각각의 하위장들 사이의 긴장과 대결이 전제될 때 형성되는 것이자 또한 이들 사이의 투쟁이 있을 때라야 장의 성장이 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투쟁의 과정에서 획득된 권력과 제도화는 장의 수준과 성격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인터넷 대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문화 권력의 양태는 우리의 문화적 장의 수준과 성격을 말해주는 지표가 된다. 그리고 이는 곧 그것을 양산하는 대중의 수준과 성격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과 권력의 장은 구조적으로 상동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셀럽시인들의 전성시대가 시의 르네상스라는 의미있는 현상을 가리키지만, 특정 셀럽이 문학의 궁극적 목표도 절대적 가치도 될 수 없는 것도 이점에서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문화 종사자들이 추구해야 할 바는 명백하다. 그것은 대중의 진보와 장의 진화를 위해 자신이 가늠하는 문학의 가치를 내세우는 일이 된다. 문학의 장 속에서 자신이 속한 하위장을 실현하고자 투쟁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자신이 꿈꾸는 문학의 정의와 본질, 가치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너무도 희소하여 대중과 교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두운 그늘에서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 고백적 중얼거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추기를 위해 존재할 수도 있다.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 사라짐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이기언,「문학은 무엇일 것인가?」『예술가』2017. 가을, p.24.)이라 여기며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제도의 이면을 향해 나갈 수도 있겠다. 의도적으로 일반대중의 요구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정치 경제적 문학행위를 거부하고 문학의 품위를 지키려는 일(현택수, 앞의 글, p.28.) 도 가능하다. 모든 문학들이 대중과의 결합과 문화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모든 시인들이 셀럽 되기를 꿈꿀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이 규정하는 문학의 정의를 바탕으로 살아 존재하는 일, 그것을 통해 문학의 가치와 자율성과 창조성을 실현하는 일이 요구된다. 부르디외는 문학의 그와 같은 실재함이 경제자본을 키우는 대신 상징자본을 확대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잠재된 문화 자본이라 한다(위의 글, p.28.). 문학의 새로운 정의를 내세우는 상징자본은 문화 권력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문학의 차원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문화의 장을 성장시킬 저변이자 대중의 의식을 진보에로 이끄는 동력이 될 것이다. 또한 이를 묵묵히 실현하는 작가들이 많을수록 문화의 토양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며 문화는 더욱 높은 수준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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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토피아』2017-겨울호 <특집 / 셀럽작가 전성시대>에서

  * 김윤정/ 문학평론가, 2007년 『시현실』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문학비평과 시대정신』『불확정성의 시학』등, 강릉 원주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