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환갑상을 받은 『얄개전』(조흔파 지음)/ 정명숙(저자의 아내)

검지 정숙자 2018. 2. 1. 19:13

 

<산문>

 

    환갑상을 받은 조흔파의『얄개전』(1955, 조흔파 作)

 

    정명숙(저자의 아내)

 

 

  지난 2015년, 1955년에 청소년 잡지 학원사에서 나온 『얄개전』이 탄생 60주년을 맞았다. 남편 조흔파가 학원 잡지에 일 년 반 동안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 1955년 4월이고, 그 인세印稅로 우리는 6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구제품을 줄여서 입었는데 철없는 신부는 종로 화신백화점 옆에 있는 신라주단에서 제일 비싼 나일론 옷감으로 맞추어 입었는데, 나일론이라 땀을 뻘뻘 흘렸던 기억밖에 없는 우리의 결혼도 환갑을 맞은 것이다.

  흔파 생전 표창이나 상 같은 것을 받은 일이 없는데 2012년 국립중앙도서관에 조흔파 작품 및 유품과 중요자료인 고서들을 기증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35년 만에 정말로 감격스러운 보은報恩의 상을 받았으니 가슴이 메일 듯 감동했다.

  매년 12월이 되어 크리스마스다, 연말이다 모두가 들뜰 때 나는 심란하고 우울하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 날의 일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내게서 떠날 줄 모르고 영상처럼 돌아가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죽음만큼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직도 그는 내 곁에 살아있는 것처럼 그가 보던 책갈피에 옛날 주인장朱印狀처럼 몇 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부하에게 내리는 명령서나 지침서 같은 것들이 나와 나를 놀라게 한다. 그가 60세에 갔는데 그 흔적들이 여기저기 책을 뽑아들 때마다 불쑥 나타나 맴돌며 떠날 줄 모른다. 너무나 짧은 생을 아쉬워했음인지 딸의 초경일 메모와 언젠가 먼 훗날 딸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결혼식 장면이 그려진 메모가 있어 별것을 다 기록하는 남자라는 생각을 하며 숙연해진다.

  얼마 전 1957년 10월 24일, 부산 해운대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나왔다.

 

  무사히 왔소. 주위가 퍽 조용하고 멀리 가까이 파도소리가 들릴 뿐. 호텔 柱礎를 씻고 해변가 고급호텔 객실 전망이 너무 좋아서 제법 도시에서 찌든 먼지를 씻어줍니다. 그러나 글쓰기에는 도무지 안 되고, 높은 안락의자와 낮은 탁자 여기서는 이 편지 쓰기도 어려운 형편이요. 게다가 식사조차 만만치 않아 역시 당신 곁 초라한 서재로 돌아가려고 항공사에 문의했던바, 오늘은 좌석이 매진이라하니 하는 수 없이 예정대로 다음 날 떠나려 하오. 희미한 조명등 여기는 글쓰기보다 술 마시기가 안성맞춤이구려. 이번 여행은 완전히 실패. 그러나 얻어진 것이 없다 못하겠소. 전에 여기를 왔을 때는 비행장에서부터 한 시간쯤 걸어서 사촌 형 집에 돈 꾸러 갔던 것이고, 이번은 호기롭게 돈을 쓰려고 온 것이니 그것도 다르거니와 여유있게 관찰하였기에 앞으로 집필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듯하오. 客舍에서 편지 쓰면서 맛보는 나그네의 향수, 그러나 비행기로 한 시간 반 만에 왔는지라 도무지 멀리 떠났다는 기분이 아니어서 참으로 유감이오. 곧 돌아가리다. 어쩌면 이 편지가 나보다 늦게 도착할는지도 모르겠소.

 

  1957년 10월 24일     흔파

 

 

  이 편지는 얄개전이 1955년 나오고 2년 뒤, 잡지마다 연재가 나가는데 매일 집으로 쳐들어오는 글벗들의 심술궂은 방해에 글 써오겠다며 도망치듯 떠난 길에 아내에게 쓴 편지인데, 내가 읽고 두꺼운 책 속에 꽂아둔 것이 50여 년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지난 해(2015년) 말, 어느 출판인 모임 저녁 초대를 받았다. 요즘 나는 저녁 초대는 일체 사절하는데 초대한 편의 인사들도 6·70 세대여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실은 얄개전을 마지막 간행했던 유연식 사장이 주관하는 모임이었다.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이 너무 고마워 나갔더니 모두 조흔파를 자기들 청소년기를 회상하며 기리는 사람들이었다.

  영화, 출판, 잡지, 방송 등 얄개전 탄생과 관련이 있는 분들인데 그들도 일선에서 은퇴한 퇴역이라는 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중에 장학출판사와 육민사 사장은 모두 고인이 되고 그 아들이 나와 주었는데 육민사 최태열 사장이 1975년 출판한(월간중앙연재) 만주국滿洲國이 요즘 인문학의 대두로 빛을 보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1973년에 『만주국』에서 이미 동북아의 역사를 구상하고 썼다. 흔파의 인문학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소위 "동북공정" 정책을 피며 만주 일대를 자기네 역사에 편입하려 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아베 정권이 허구적인 "임나일본부"설을 부활시켜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수록하기 위해 만주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를 몇 구절 지워 일본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려는 조작극을 재부상 시키고 있는데, 흔파는 이를 이미 예견하고 허구의 옷을 입혀 이 문제를 장편소설 『만주국』으로 50년 전에 집필한 것이 빛을 보게 되었다니 기쁜 일이다.

  실은 조흔파는 역사물을 많이 썼다. 『얄개전』이 5,6,70년대 공전의 대히트로 흔파가 역사물 쓴 것은 완전히 묻히고 말았는데 사후 30여 년이 지나서 빛을 보게 되었다니 감개무량하다. 흔파가 쓴 역사물들은 소설국사, 대한백년, 사건백년사(日譯), 주유천하, 양녕대군, 세검정, 이성계, 길삼봉, 소설한국사(전16권), 소설성서(전9권), 만주국 등 많이 남겼는데 독자들은 그런 사실은 기억하지 않고 『얄개전』만 기억하게 된 것이다. 어떻든 한 작가에게 히트 작품은 하나로 족해야 하나보다. 흔파가 생전 인세 들어올 때마다 하던 말로 나에게 욕심내지 말라는 경고였던 것 같다.

  그가 1980년 사망하고 그해 흑백텔레비전에서 컬러텔레비전 시대가 되자 세상은 너무 험해져서 죽은 자의 작품은 산 자가 제멋대로 훔쳐가거나 방송작가라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라디오로 훔쳐갔다. 나 몰래 여기저기서 전파를 타고 뻔뻔스럽게 나가서 일부는 저작권협회에 제소하기도 했지만 너무 많아 손 쓸 수 없었다. 산 사람 것도 훔쳐 표절하는 세상에 하물며 죽은 자를 보호할 길은 정말 미비했던 아픈 기억이다.

  얄개전은 1955년 출간하여 2004년까지 100만 부가 나간 장수도서였다. 1976년 한국일보에 <신고전을 찾아서>에 일곱 번째로 나간 장수서적으로 남았다. 탄생 60주년이 되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가 대물림하며 나두수(얄개)의 기발한 활동에 웃음을 함께한다는 신화를 남겼다.

  죽은 선배에 대한 대접이 고작 유작들을 훔쳐다가 마구 쓰는 표절이나 날강도보다 더한 짓을 하는 기가 막힌 일들을 겪으며 그래도 흔파의 아내가 이렇게 살아 증언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구나 생각한다. 작가는 공부, 즉 독자가 제일이지 하던 그 넉넉함과 호방한 성품, 웅장한 체구, 익살스러운 너털, 능청스러운 풍자, 기교 넘치던 해학, 어릿광대 같은 기지, 누구도 못 따를 풍류, 깔끔이 지나쳐 결벽증 환가 같던 그, 자는 시간도 아깝다던 바지런함, 큰 꿈을 어찌하고 홀연히 떠난 사람.

  조흔파의 『얄개전』이 영화화된 것은 1965년 제일영화사 신상옥필름의 이형표 감독에서 1992년 거성필름 김응천 감독까지 무려 8번, 그 외에 『서울의 지붕 밑』, 『주유천하』, 『와룡선생 상경기』, 『브라보 청춘』, 『도심의 향가』, 『태조 이성계』, 『임꺽정』, 『에너지선생』, 『이별의 강』, 『윤심덕』, 『강명화』, 『돌지 않는 풍차』등의 작품이 신상옥 감독을 비롯한 최현, 유한철, 한형모, 안현철, 김수용, 임권택, 정승문, 최훈, 강대진, 석래명, 김응천 등의 감독에 의해 26편이나 영화화되어 영화 진흥공사 기록관에 있다니 놀랍다.

  10여 년 전 서대문에 있는 "화양극장"에서 얄개전을 상영해 어디서 상영허가를 받았나 알아보았더닌 배우 복혜숙 선생의 조카 복철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와서 죽을죄를 지었노라 사과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그러나 또 한편엔 2014년 어느 시골 극장에서 『얄개전』상영을 허가해 달라는 사람이 왔던 일이 있다. 이런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주 드문 일이다. 그래도 그들은 양심적인 것이고 대개는 은근슬쩍 몰래 얼마든지 하는 것을 내가 알 수 없다. 1960년대 『얄개전』은 경기, 서울 중학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부교재로도 쓰인 일과 연극 때문인지 2004년부터는 "구몬학습"이라는 곳에서 2페이지를 쓰기로 약속되어 아직도 저작권 협회에서 1년에 적지만 몇 십만 원의 복사료가 입금된다.

  한 작가를 60년 기억해준다는 것은 작가의 승리라 생각하며 환갑인 2015년 보은의 상으로 돌아왔으니 이번 한식날에는 모란공원 흔파에게 가서 축배를 드려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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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문학』279호 <散文>에서/ 2017.11.23. 펴냄

  * 정명숙/ 서울시 강서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