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외로움이 두려우면 정의로울 수 없다/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8. 3. 21. 01:29

 

<나의 시론>

 

    외로움이 두려우면 정의로울 수 없다

    -발상, 발언, 투혼에 이르기까지

 

    정숙자

 

 

  1. 자기 갱신을 위한 독서

  자, 너에게 앞으로 십 년 동안 마음껏 쓸 수 있는 돈과 자유와 시간을 주마. 여행이든 사치든 고급 요리에 파묻히든 제한 없는 돈과 자유와 시간을 주마. 그리고 또 너에게 십 년 동안 마음껏 사고 읽고 밥 먹을 수 있는 돈과 공간과 시간과 자유를 주마. 선택하라. 너는 무엇을 가지겠느냐?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전자의 그 모든 화려함을 떠나 간간이 책 살 수 있는 돈과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자유를 원할 것이다. 천국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책이 없다면 나는 지루한 나머지 연옥만을 느끼게 될 것이리라. 영혼을 밝혀주는 벗이자 태양, 그가 곧 책이니 말이다.

  2016. 2. 11. 이 날 나는 약간의 긴장감을 안고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종합검진(건강보험공단) 결과를 보러갔다. 늘 새로운 발상과 표현에 고심하는 나로서는 뇌의 안부가 최우선 관심사였다. 컴퓨터 화면을 검토하던 의사 선생님의 첫 번째 질문, “책을 많이 보세요?” “뇌 사진에 책을 보는 것까지 찍히나요?” “그럼요! 책을 많이 보시는 분은 뇌에 주름이 많습니다.” “뇌에 주름이 많으면 좋은 건가요?” “그럼요!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은 뇌에 주름이 굉장히 많아요.” “아, 네~.” “2018년에는 뇌 검사는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아, 네~.” 그리고 단백질 부족(철분 부족)이니 육류 섭취하라, 아침엔 탄수화물(뇌 활성화를 위해)을, 또 비타민C 부족이니 야채 풍성히… 등의 조언이 있었으나 대체로 깨끗했다. 야호!

  시인으로 삶을 건너면서 단 하루라도 자기 갱신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 문장이야말로 노약이나 쇠퇴를 불러오고 말 것이다. 비록 자기 갱신이 현실에 닿지 못하고 꿈에 그칠지라도 그 꿈꿈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그를 위한 방편으로 나는 책을 여행하고 책을 입으며 책을 섭취해보는 것이다. 자기 갱신-이는 아침마다 내가 나에게 제출하는 주문장이다.

 

 

  2. 현장 파악을 위한 독서

  내 평생에 후회스럽지 않은 일 하나를 꼽으라면 어린 시절/젊은 시절을 통째로 고전 읽기에 바쳤다는 점이다. 열댓 살 적부터 단절 없이 동서양의 명저들을 느릿느릿(시간 아까운 줄 몰랐으므로) 정독했는데, 그로인해 아무리 곤궁한 현실이 엄습해도 나의 내면은 항상 새로웠고 홀로 빛났다.

  그 무렵엔 정작 시인이 되리라는 포부도 눈뜨지 않았고, 그저 그런 공기가 좋아서 그랬던 것이었다. 중간에 등단이 되어 잠시 표피적 욕망이 끼어들기도 했으나, 이제 내 소녀시절의 청순으로 돌아가 진정한 인간의 본성과 문맥을 만나고 싶어진다. 작금의 세상을 너무 많이 봐버린 탓이 아닐까.

  2017. 9. 15. 이 날은 딸이 세운 여행 계획에 의해 여권을 신청하러 구청에 갔다. 나에게 해외여행이란 단 한번 ‘한국시인협회’에서 갔던 <제8회 아세아시인회의 2002 서안대회>뿐이었기에 여권을 새로 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문을 찍는 과정에서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누르는 게 아니라 스캐너에 접촉하여 지문을 뜨는 방식이었는데, 지문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가운데 손가락을 대보세요.” “입김을 불고 대보세요.” “다시 한 번 대보세요.” 등 여러 번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안 되겠네요. 그냥 구두로 작성하겠습니다.” 아뿔싸! 어안이 벙벙한 나는 묻는 말에 공손히 답변할 따름이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옳아, 책장을 넘길 때 닳았던 것이다. 한 장 한 장 손끝의 감각으로 넘기지 않는가. 금년에 본 것만으로도 잡지 182권, 시집 140권, 철학 서적, 기타 단행본 등등(12월 13일 기준). 읽을 때 넘기고, 노트할 때 넘기고… 이상의 독서는 현장 파악의 일환이며, 현장 파악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어찌 일신일일신우일신을 바랄 수 있으리오.

   

 

  3. 자아 회복을 위한 독서

  삶에의 실감은 고통에 있다. 책 읽기는 지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이며, 인간의 내면이란 지구의 속내와 다를 바 없다. 맨틀(mantle)의 최상부는 섭씨 100도 정도, 핵과의 경계면은 4,000도에 육박한단다. 거기 암석은 액체가 돼야 하지만 높은 압력 때문에 고체 상태로 유지된다고 하니,

  지구든 인간이든 살아있기에 그리 끓는 가슴이라고 여기면 오산일까? 어떤 고통과 고독에 휩싸여 심장이 굳어버릴 지경에 부딪히더라도 책 속에는 반드시 위안점이 있다. 꼭 습득해야 할 지식이 또한 거기 있으며 상상력까지도 촉발시켜 한 눈금 한 눈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도와준다. 화호!

  2017. 10. 26. 머리를 감고 말리는 도중 거울 속에 나타난 자귀꽃 한 송이. 그 꽃은 내 머리털이 염색된 것이었다. 검정이나 흰색이어야 할 머리에 웬 분홍이란 말인가. 몹쓸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샴푸나 수질에 이상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에 의문을 거듭하던 찰나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빨간 볼펜 자국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올 여름, 잉크도 결기가 풀어져 줄을 칠 때마다 눈곱이 심했던 까닭이다. 걸으며 읽을 때나 잠들기 전 침대에서, 또는 기상 전 독서 중에도 그 뭉쳐 나오는 눈곱을 머리에 쓱쓱 문지르곤 했던 것이다. 길독서와 침대독서 땐 마땅히 닦을 데도 없거니와 책 속에 얼룩을 남긴다는 건 감히 감행해선 안 될 노릇이었으므로. 그 소행이 매일 반복된 결과 느닷없이 맞닥뜨린 일종의 필화였음을.

  뇌는 또 한 대의 우주선이다. 우주공간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일반상대성원리가 조금은 적용되리라. 소우주라 일컫는 우리의 뇌는 금방 갈아놓은 칼, 이제 막 청춘에 눈뜬 장밋빛 이상으로 날카로울 수 있다. 우리에게는 고통이라는 연료가 무진장하지 않은가. 자기 갱신을, 자아 회복을 위한 양서가 지구 가득 꽂혀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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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사람』 2018-봄호 <시와사람 초대석/ 나의 시론>에서

  * 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뿌리 깊은 달』외, 산문집『밝은음자리표』『행복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