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정숙자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서평 : 오민석

검지 정숙자 2018. 1. 21. 18:48

  

<서평>

     

    액체의 시간을 견디기

     -정숙자 시집 읽기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Ⅰ.

  정숙자의 시를 처음 읽는 독자들은 그 낯설음에 당황할 것이다.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이라는 시집의 제목도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액체계단" 뒤에 쉼표가 없으므로 "액체계단"은 "니체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액체계단" 뒤에 조사助詞가 없으므로 "액체계단"은 "살아남은"의 대상도, 조건도 아니다. "액체계단" 다음에 연결사가 없으므로 이것은 "니체들"과 등위等位를 이루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이 시집은 제목부터 규범/비규범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 시집의 "일러두기"에는 "이 시집의 제목과 시 본문 가운데 일부는 저자의 뜻에 따라 현행 한글맞춤법 및 본 출판사의 표기 원칙과 다르게 표기했음을 미리 알립니다."는 친절한 안내가 있지만, 이는 비단 맞춤법이나 표기 원칙만의 문제가 아니다. 

  규범 안에 있는 언어를 우리는 '일상 언어'라고 부른다. 시적 언어가 가장 혐오하는 언어는 규범 언어, 일상 언어이다.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의 창고에서 탄생하지만 일상 언어를 가장 혐오한다는 점에서 배신의 언어이며 전복顚覆의 언어이다. 그러니 '규범'을 어기지 않고 어떻게 '시적인 것(the poetic)'을 생산하겠는가. 시적 언어가 규범을 배신할 때, 독자들은 모든 배신에 대하여 그러하듯이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점에서 시적 언어는 '개기는' 언어이며 스스로를 낯설게 만듦으로써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언어이다. 정숙자 언어의 '낯설음'은 독자들을 텍스트 바깥으로 자꾸 밀어낸다. 그것은 마치 브레히트 (B. Brecht)의 '소외 효과(alienation)'처럼 독자들에게 편안한 소비의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숙자는 개념, 이미지, 상징, 문장과 문장 사이의 접점들을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써 사유에 게으른 독자들로 하여금 '사유思惟"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리하여 독자들이 정숙자의 시를 읽으면서 "이게 뭐지?"라고 혼잣말을 내뱉는 순간 독자들은 정숙자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다. 텍스트로부터 이화異化된 독자들이 소외 상태에서 정숙자의 텍스트에 서서히 동화同化되는 과정이 정숙자 언어의 문법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가령 이 시집의 첫 시, 「관, 이후」를 보자.

 

 

  무덤, 거기서부터 잣대가 투명해진다

  과거의 별에게 특혜란 없다

    -「관, 이후」앞 부분

 

  제목의 "관" 본문의 "무덤", "과거"는, '죽음', '사라진 것', '앞서간 것' 등을 의미하는 유사어類似語들이다. 말하자면 이 시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 이미 죽은 것들의 "이후"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주된 관심은 따라서 '이전'인 과거가 아니라 '이후'인 '현재'이다. "무덤"에서부터 "잣대가 투명해진다"는 것은 과거(이전, 죽음), 즉 그 "특혜란 없"는 "별"이 현재를 평가하는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기준', 즉 출발점임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현재는 냉정하게 평가된 과거 위에서 시작되어 자신도 (마침내 냉정하게 평가되는) 과거가 된다.  

 

 

  그 책갈피에선 개구리도 몇 마리 뛰어내려 

  괄~ 걸~ 괄~ 걸~ 과거를 운다 

  수맥의 후원도

  덩굴손도 시렁도 없는

  오로지 작품만이 중력이었던 타인의 고독을 갚으며 운다

 

  '백 년은 가히 등이다' 표4 뒤의 오늘,

  오늘은 다시 또 백 년을 넘겨받는다

   -「관, 이후」뒷부분

 

  그리하여 "관, 이후"(현재)에 '관'의 시대(과거)를 돌아보면 그것은 아무런 "후원도/ 덩굴손도 없는/ 오로지 작품만이 중력이었던 타인"이며, 현재 그것에 아무런 "특혜"를 부여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주체가 그 "고독을 갚으며 운다"는 것은 그의 "백 년을 넘겨받"으며 자신도 나중에는 결국 그 고독한 "과거의 별"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시의 의미를 이렇게 읽어내려면, 즉 이 시에 동화되려면 이 시를 적어도 두, 세 번은 천천히 반복해서 읽어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독자들은 쫓겨난 이방인에서 초대받은 손님으로 서서히 변하게 되며, 그 무수한 낯설음이 사실은 의미의 환대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의 강력한 이화작용을 겪으며 텍스트에 동화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고, 낯설음을 견디며 새로운 언어와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숙자의 텍스트에 미리 정해진, 완결된, 의미의 목적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화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화하는 언어이며, 화해의 과정에서 계속 불화를 일으키는 언어이다. 따라서 위에서 보여준 「관, 이후」의 읽기는 그 친화와 불화의 과정에서 찾은 의미의 한 회로일 뿐이다. 다른 독자들은 텍스트의 다른 문을 열고 다른 길을 따라 다른 출구로 나갈 수 있다.

  롤랑 바르트(R. Barthes)는 규범 언어를 위반하는 텍스트가 최고의 기쁨(pleasure)과 희열(bliss)을 생산한다고 하였다. 그가 볼 때 텍스트의 희열은 작가가 뻔한 의미의 회로를 만들어놓고 다른 해석의 길을 차단할 때 최소화된다. 반대로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처럼 의미를 생산하도록 텍스트의 다양한 회로를 열어놓는 '작가적 텍스트(writerly)'야 말로 훌륭한 텍스트이다. 이런 점에서 정숙자의 시들은 낯선 언어로 독자들을 난감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도록 만드는 '작가적 텍스트'이다. 정숙자의 시편들 속에서 수동적 소비자가 될 것을 거부당한 독자들은 스스로 길을 찾음으로써 이미 생산의 또 다른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숙자는 의미를 독점하지 않고 스스로 의미의 교차로가 됨으로써 독자들이 그 위를 마음대로 지나가게 만든다.

 

 

  Ⅱ.

  어찌됐든 이 시집의 첫 번째 시인 「관, 이후」에서 나는 정숙자의 시세계를 열만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정숙자는 이 시 속에서 과거의 작가들로부터 과거의 시간을 넘겨받으며, 현재의 냉정한 비평 앞에서 "특혜"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고독에 몸서리치고("무덤이 열렸다고 말할 뻔했다"), 자신의 글쓰기 역시 그 고독에 대한 빚 갚음임("고독을 갚으며 운다")을 고백한다. 이렇게 보면 정숙자는 누구보다도 "전통과 개인적 재능"(T.S. 엘리어트)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시인이다. 순전한 의미의 개인적 재능은 없다. 모든 재능은 전통과의 관계에서 생산되며 스스로 전통이 된다. 개별성이란 집단성을 이어받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과 결별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시간의 연속성 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이와 같은 '흐름' 속의 분자分子들이며 '무엇-되기'의 과정에 있다.

 

 

  현재는 측근이며 최측근이다

  앞 옆 뒤쪽에 위아래에 멀리 또는 가까이 들어차 있다

  (……)

  그리고 몇 광년쯤 돌아보리라

  (……)

  거울이여 '현재'는

  측근도 최측근도 아닌 나 자신이군요

  수많은 신체와 정신이었군요

  방금 스친 현재도

  끝 모를 공간으로까지 흩어지겠군요

    -「현재의 행방」부분

 

  "나 자신"이라는 "현재"가 "수많은 신체와 정신"의 축적된 결과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의 "고맙다는 인사를 띄워야겠습니다/ 제가 돕지 못한 그들이 저를 위해 떠돌다니요!"라는 전언은 누적된 전통에게 바치는 한 새로움의 겸허한 헌사이다.

 

 

  더 이상의 새로움은 '이미'에게 포위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짙푸른 폭발이 있다

  봉쇄된, 봉쇄된, 봉쇄된 기암-절벽을 뚫어

 

  빈틈을 입증하는 뿌리가 있다

  먼 산 이끄는 외솔이 있다

    -「굿모닝 천 년」부분

 

  "이미"가 전통이라면 "폭발"은 현재이다. " 더 이상의 새로움은 '이미'에게 포위되었다"라는 말은, 모더니스트들의 실험의 말미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내뱉는 "모든 형식은 고갈되었다"라는 절망어린 고백과 일치한다. 새로운 형식은 그 자체 새로움이면서 동시에 다른 새로움을 막는 "봉쇄"의 언어이다. 모든 새로운 형식은 그것을 마지막의 형식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미'에게 포위된 언어는 결국 "폭발"하고 만다. 모든 봉쇄의 언어에는 "빈틈"이 있게 마련이고, 새로움은 봉쇄의 전통이 탐지하기 못하는 곳에서 빈틈을 발견하고 그것에 구멍을 내며 균열을 창조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새로움은 다시 "먼 산"을 생산하는 외로운 주체("외솔")가 되는 것이다. 3부에 실린 「칸트 프리즈」연작시들은 대부분 이런 시간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

 

 

  Ⅲ.

  그렇다면, "폭발"의 사유와 언어는 어떤 형상을 입고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액체"이다. 고체가 결정된 것, 완성된 것, 변하지 않은 것, 닫힌 것을 의미한다면, 액체는 그 모든 결정성을 허물어뜨리는 힘이다. "모든 견고한 것들은 대기 중에 녹아내린다(All that solid melts into the air)."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예언은 생산양식의 역사만이 아니라 문화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샬 버만(M. Berman)은 이 구절을 차용해 자신의 저서명으로 삼으면서 그 책의 부제를 "근대성의 경험"이라고 달았다. 그는 근대성 그리고 그것의 문화적 표현인 모더니즘이야말로 그 모든 "견고한 것들"의 충돌과 무너짐의 결과라고 본다. 그는 소위 탈근대성 역시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근대성의 실현의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액체 근대』를 쓴 지그문트 바우만(Z. Bauman)과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바우만은 근대를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구분한다.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 근대'라는 개념은 사실 다른 논자들이 '탈근대성'의 개념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고체 근대가 무겁고 체계적이며 응축된 것이라면, 액체 근대는 그 모든 체계들을 뛰어넘은 유동성, 가벼움, 분산分散성, 양가성(ambivalance)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정숙자에게 있어서 전통을 뛰어넘는 "폭발"의 사유와 언어는 바로 액체의 언어이다.

 

 

  직각이 흐르네

  직각을 노래하네

  직각

       직각

            직각 한사코 객관적인

  도시의 계단들은 경사와 수평, 깊이까지도

  하늘 깊숙이 끌고 흐르네

 

  (……)

 

  바로, 똑바로, 직각으로 날아오른 계단은 자신의 DNA를

모두에게 요구하네.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용치

않네. 가로, 세로, 직각으로 눈뜬 모서리마다 부딪치며 흐르

는 물소리 콸콸 콸콸콸 노상 울리네

 

  (……) 생사의 지엄한 잣대가 계단 밑 급류에 있네.

   -「액체계단」부분

 

  수많은 "직각"으로 이루어진 계단은 '고체 계단'이다. 그것은 자신의 문법을 강요하고 다른 목소리를 허용치 않는("자신의 DNA를 모두에게 요구하네.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용치 않네.") 시스템이다. 그러나 하늘 높이 솟구치는 고체의 계단은 언제든지 "액체계단"이 될 위험에 임박해 있다. 그것의 "가로, 세로, 직각으로 눈뜬 모서리마다" "콸콸 콸콸콸 노상 울리"며 "부딪치며 흐르는 물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은 모든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힘이며, 수직을 수평으로 만드는 에너지이다. 물은 가둠이 아니라 열림을 향해 있으며 응축이 아니라 분산을 향해 있다. 이런 점에서 액체는 결정성을 비결정성으로, 구축(construction)을 해체(deconstruction)로 만드는 힘이다. 액체의 언어는 그 모든 진리독점을 거부하는 전복의 언어이다. 

  액체에 의해 "경쾌 발랄 순식간에 계단이 접힌다"(「풍크툼, 풍크툼」)롤랑 바르트(R. Barthes)의 『밝은 방』(『카메라 루시다』로도 알려져 있다)에 나오는 사진 용어인 푼크툼(혹은 풍크툼 punctum)의 라틴어 어원은 "상처, 찔린 자국, 흔적"이다. 푼크툼은 "찔린 자국이고,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로서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 그 우연"이다. 스투디움(studium)이 대상의 일반성을 전달하는 언어라면, 푼크툼은 일반성 너머와 배후에서 그것을 교란시키는 상처의 언어이고 사랑의 언어이다. 그것은 상투성과 복제의 문법에 구멍을 뚫어 사진의 평면성을 깨뜨린다. 푼크툼은 코드화되고 정형화된 스투디움을 불규칙하게 가로지르며 탈코드화(decoded)된 언어를 생산한다. 사진이 예술로서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고 찌르는 것, 그리하여 기억과 무의식 속의 상처와 흔적을 호출해내는 것은 바로 푼크툼을 통해서인 것이다. 정숙자가 "경쾌 발랄 순식간에 계단이 접힌다"는 전언을 「풍크툼, 풍크툼」이라는 제목의 시 속에 넣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풍크툼"은 고체의 코드를 해체하는 액체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Ⅳ.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액체의 시간을 견디는 것밖에 없다. 정숙자에게 있어서 시간은 고체의 전통을 깨뜨리는 액체의 시간이며, 액체는 그 모든 결정성을 비결정성으로 해체함으로써 존재를 '됨' 혹은 '되어있음'이 아니라 '되기(becoming)'로 만드는 힘이다. 정숙자는 이러한 '되기'로서의 존재의 모습을 들뢰즈(G. Deleuze)의 먼 철학적 선배인 니체에게서 찾는다.

 

 

  그들, 발자국은 뜨겁다

  그들이 그런 발자국을 만든 게 아니라

  그들에게 그런 불/길이 맡겨졌던 것이다

 

  오른발이 타 버리기 전

  왼발을 내딛고

  왼발 내딛는 사이

  오른발을 식혀야 했다

 

  (……)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

  물결치는 산맥들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에 진입한

니체들의 술잔 속에서

   -「살아남은 니체들」부분

 

  액체의 시간을 사는 자들은 한 생각이 굳어지기 전에 다른 생각을 해야 하는 자들이며, 한 발이 지상에 닫기도 전에 다른 발을 뗴어놓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규정된 사유의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액체의 시간대에서는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유목민들이다. 그것은 낡은 전통의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이며, 모든 견고한 것들을 무너뜨리는 "광기"의 사유들이다. "니체들의 술잔"은 모든 고체들의 완결성과 규정성을 녹이는 액체의 넘침이고, 이리하여 그 모든 현재는 "살아남은 니체들"의 것이다. 정숙자는 늘 시간에 대한 사유에 잠겨 있으며, 그는 그 시간이 전통과 개인이 충돌하는, 개체의 높은 계단과 탑들이 무너지는 액체의 시간임을 항상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그 모든 견고한 것들을 무너뜨리되, 그렇다고 그 무너진 자리에 안주할 수 없는 삶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태생적 유목의 삶이며, 이런 점에서 시인은 "니체들의 술잔 속에서" 모든 견고한 것들이 무너지는 굉음을 들으며 견디는 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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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표현』2018-1월호 [시집 아케이드]에서

  * 오민석/ 1990년『한길문학』으로 등단, 199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그리운 명륜 여인숙』외, 시 해설서 『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외, 평전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외,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외, 현 단국대 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