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7 청마문학상 심사평/ 정과리

검지 정숙자 2017. 12. 12. 22:15

 

 

     2017 청마문학상 심사평

 

     정과리 / 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예심을 통해 올라온 7권의 시집 중에서 김상미의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이윤학의 『짙은 백야』, 정숙자의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천양희의 『새벽에 생각하다』(가나다 순)를 특별히 주목하였다. 이 시집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해당 시인들이 그 동안 구축한 시세계를 연장하면서도 타성에 빠지지 않고 더 큰 활기를 시에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시인들이 시에 관한 한 아직 ‘많이 배고프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허기가 그들로 하여금 새록새록 새로운 시를 쓰게 한다. 한국의 중년 시인들이여, 축복 있으라!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는 시에 대한 의지가 용암처럼 분출하고 있다. 하지만 그냥 ‘시 쓰고 싶다’고 외치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시를 쓰기 위한 조건과 재료와 방법과 태도의 모든 문제들이 깐깐하게 실험되면서 그로 인해 나타난 시 쓰기의 좌절에서부터 성취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연들이 장구한 드라마를 형성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시 쓰는 생체험을 그대로 겪는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의 화자는 ‘시드는’ 나이로 접어든 사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이는 점차로 기운이 빠지고 목소리에 힘이 죽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지 않다. 여전한 생의 희열이 시집 안에 작렬하고 있다. 시들고 있는 삶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신생의 재료로 재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이는 “악착같이 ‘세상의 얼룩’을 빨아먹고 뱉어내고 또 빨아먹는 시인 K”이다. 이로써 매 순간이 재탄생한다. 시인은 그 광경을 “눈물나게 외로운 전광석화”라고 말한다. 전광석화로만 이루어진 끝없는 여행, 그것이 그의 시 쓰기이다. 『짙은 백야』에는 시인 특유의 광경, 즉 무의미한 사물들과 생의 부스러기들이 부산히 움직이면서 생동을 일으키는 광경이 있다. 그의 모든 하찮은 것들은 “서로에게 확대 해석되”면서 현실과는 다른 생의 무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무대에서는 “한심한 내 영혼이 비탈에 누워/ 수면의 물고기 입맞춤 자국마다 별빛을/ 듬쭉 담아두”니, 거기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최고의 자유와 최고의 평등을 누린다. 이 이윤학적 존재론은 조금도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 놀라울 뿐이다. 『새벽에 생각하다』에서 시인은 진정한 시를 찾아가는, 결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를 천형에 처해진 존재이다. 그는 그것에 대해 뻐기지도 한탄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운명을 의연히 견디어 낼 뿐이다. 그러나 그 견딤 속에서 시인은 불현듯 자신의 음성과 용모와 자태와 시선이 거듭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걸 느끼는 순간 그는 진정한 시를 향해 가는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른다. 이걸 그저 즐거운 장관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에는 한 땀 한 땀 삶과 언어를 넓혀 가는 힘겨운 노동과 진땀의 자취가 진하게 배어 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가 이룬 결실을 누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노동의 과정 전체를 함께 겪는 것이다.

  심사자들은 오랜 숙의 끝에 천양희 씨의 『새벽에 생각하다』를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무엇보다도 시인의 천형을 신산과 고난으로 이어 온 오랜 세월이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축하를 드리며 다른 분들에게도 저마다 훌륭한 열매를 거두신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 ▩

 

 

   심사위원

   홍신선(시인, 전 동국대 교수)

   글_정과리(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김기택(시인, 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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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통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2017. 10. 21. <통영시문학상운영위원회> 펴냄

  * (비매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