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층』2017-겨울호
[시집 속의 시 한 편/ 올해의 좋은 시집_총평(발췌): 현순영(문학평론가)]
살아남은 니체들
정숙자
그들, 발자국은 뜨겁다
그들이 그런 발자국을 만든 게 아니라
그들에게 그런 불/길이 주어졌던 것이다
오른발이 타버리기 전
왼발을 내딛고
왼발 내딛는 사이
오른발을 식혀야 했다
그들에게 휴식이라곤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도움이 될 수도 없었다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런 불/길이 주어졌기에!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왼발과 오른발에 (끊임없
이) 달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
우기雨期에조차 불/길은 식지 않았다. 혹자는 스스로, 혹자는 느긋
이 죽음에 주검을 납부했다…고, 머나먼… 묘비명을 읽는 자들이… 뒤
늦은 꽃을 바치며… 대신… 울었다.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狂氣에 진입한 니체
들의 술잔 속에서… 마침내 도달해야 할… 불/길, 속에서… 달아나도,
달아나도 쫓아오는 세상 밖 숲속에서.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파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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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계단
직각이 흐르네
직각이 노래하네
직각
직각
직각 한사코 객관적인
도시의 계단들은 경사와 수평, 깊이까지도
하늘 깊숙이 끌고 흐르네
날개가 푸르네
날개가 솟구치네
다음
다음
다음 기필코 상승하는
건축의 날개들은 수직과 나선, 측면까지도
성운 깊숙이 깃을 들이네
설계와 이상. 노고와 탄력. 눈물의 범주. 계단은 피와 뼈
와 근면의 조직을 요구하네. 인간이 만들지만 결국 신의
소유가 된는, 그리하여 쉽사리 올라설 수도 콧노래 뿌리
며 내려설 수도 없는 영역이 되고 만다네.
바로, 똑바로, 직각으로 날아오른 계단은 자신의 DNA
를 모두에게 요구하네.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
용치 않네. 가로, 세로, 직각으로 눈뜬 모서리마다 부딪치
며 흐르는 물소리 콸콸 콸콸콸 노상 울리네.
계단의 승/강은 눈 VS 눈이네. 한 계단 한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한눈파는 눈으로는 안녕 불가. 생사의 성패의 지
엄한 잣대가 계단 밑 급류에 있네. 너무 익숙히, 너무 가까
이, 너무나 친근히 요주의 팻말도 없이.
-전문-
■ 지금 여기서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 시/ -시적 현재의 창조와 지속(발췌)/ 현순영(문학평론가)
정숙자의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의 시적 주체는 인식의 주체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시적 주체의 새로운 인식, 그것이 많은 시편들의 내용과 형식이 되고 있다. 시적 주체는 주목할 만한 상상력으로 친숙하고 낯익은 대상을 새롭게 인식한다. 그리고 새로이 인식한 내용을 그 나름의 형식 또는 형태로써 시화詩化한다. 시인이 뽑은 시 두 편(「액체계단」, 「꽃 속의 너트」) 에서도 이러한 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액체계단」에서 시적 주체는 하늘로 치솟은 직각 계단의 꼭대기를 보는 동시에 계단 밑을 본다. 계단을 오르는 우리들의 생사와 성패를 좌우하는 "지엄한 잣대"인 급류가 계단 밑을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1~2연의 시행들은 계단처럼 배열하고 3~5연에서 행 구분을 없앤 것은 그러한 인식 내용을 시화한 형태적 고안이다. 「꽃 속의 너트」에서 각 연의 첫 문장이나 구절을 꽃잎 같은 글자체로 쓰고 그 뒤에 괄호로 꽃 속 공간을 마련하여 "꽃 속의 너트"가 무엇인지 생각케 하는 진술들을 담은 것도 그렇다. 그 형식 또는 형태 역시 시적 주체가 꽃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숙자의 시들에서는 시간의 흐름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가 인식 내용을 가시적可視的형태를 통해 보여주는 동안 시간은 현재에 멈추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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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의 너트
꽃 속에 너트가 있다(면
혹자는 못 믿을지도 몰라. 하지만 꽃 속엔 분명 너트
가 있지. 그것도 아주아주 섬세하고 뜨겁고 총명한 너트
가 말이야.)
난 평생토록 꽃 속의 너트를 봐 왔어(라고 말하면
혹자는 내 뇌를 의심하겠지. 하지만 나는 정신이상자가
아니고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어. 혹자는 혹 반박할까? '증
거를 대 봐, 어서 대보라고!' 거참 딸하구나. 그 묘한 걸
어떻게 대 볼 수 있담.)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아예 꽃 자체가 없었을 것(이야!
힘껏 되받을 수밖에. 암튼 꽃 속엔 꽉꽉 조일 수 있는 너
트가 파인 게 사실이야. 더더구나 너트는 알맞게 느긋이
또는 팍팍 풀 수도 있다니까.)
꽃봉오릴 봐 봐(요.
한 잎 한 잎 얼마나 단단히 조였는지. 햇살 한 올, 빗방
울 하나, 바람 한 줄기,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
의 애환까지도 다 모은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은밀히 풀
지.)
꽃 속의 너트를 본 이후(부터
'꽃이 피다'는 '꽃이 피-였다'예요. 어둠과 추위, 폭염과
물것 속에서도 정점을 빚어낸 탄력, 붉고 희고 노랗고 파
란… 피의 승화를 꽃이라 해요. '꽃이 피다!' 그렇죠. 그래
요. 그렇습니다.)
그늘을 지우는 꽃(을
신들이 켜놓은 등불이라 부를까요? 꽃이 없다면 대낮
일지라도 사뭇 침침할 겁니다. 바로 지금 한 송이 너트 안
에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드는군요. 아~ 얏~ 파도치는 황홀
이 어제 없던 태양을 예인합니다.)
-전문-
※ 좋은詩集 BEST 2 / 정숙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파란, 2017), 김병호『백핸드 발리 』(문학수첩,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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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2017-겨울호 <기획특집|올해의 좋은 시집 BEST 2 / 총평>에서
* 현순영/ 2013년 『서정시학』신인상 평론 부문 수상, 논문「구인회 연구」, 연구서 『구인회의 안과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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