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회안대군 묘/ 최승범(시) 조석창(글)

검지 정숙자 2018. 1. 4. 21:08

 

 

    회안대군 묘역에서

 

    최승범(시)  / 조석창(글)

 

 

  1.

  전주길 드나들땐

  어느 하루 틈내여

  저 건너 바라뵈는

  회안대군 묘역을

  살피리

  맘먹었던 일

  이제야

  성사련가

 

  2.

  한 마을 안에 들어

  담장 돌며 찾는 길도

  중늙은이 한 분에게

  겨우 얻어 듣고야

  대군의

  덩실한 무덤 앞에

  두발 밀어

  들었다

 

  3.

  아다싶이 회안대군은

  태조대왕 사남으로

  이른바 왕자의 난에

  얽히고 설키어

  끝내는

  바로 이곳에 묻혀

  솔바람 속

  쉬시는가

 

  4.

  전주시내 금상동

  범수뫼마을

  다시금 대군 묘역

  뒤돌아보며

  옛날의

  흥망성쇠를

  되짚어

  읽네

  -전문-

 

  * 블로그주 : 한글맞춤법과 띄어쓰기, 원문에 따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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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유형문화재 제123호로 부인 김포금씨와 함께 앞뒤로 놓여 있는 형태다. 주변에는 잣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묘 아래 오른쪽에는 회안대군 비석이 있다.

  이 묘가 일반적인 부부묘와 다른 점은 부인묘가 앞에 있으며, 묘가 위치한 곳도 완만한 산세에 자리잡은 데다 묘의 아랫부분을 대리석으로 테두리를 만들어 미관상 안정감을 주고 있다.

  회안대군은 조선 태조 넷째 아들로 이방원의 바로 위 형인 방간이다. 조선 건국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 공적을 세워 개국공신 및 정사공신으로 책훈됐다. 하지만 그 이후 신하의 거짓을 믿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이방원을 공격하는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후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살아가다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왕족의 묘라 부르기엔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초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묘가 위치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음택 명당으로 대대군왕지지代代君王之地라 해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아내고 있다. 전북지역에서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명한 곳이 될 정도다.

  재미있는 사실은 태종이 된 이방원은 회안대군의 후손들이 난을 일으키거나 왕위에 앉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묘가 있는 터에 뜸을 떠 흐르는 맥을 끊었다고 한다. 그 끊어진 곳은 '산맥을 끊은 흔적'이란 팻말이 표시돼 있다. 이후 무학대사는 뜸뜬 자리는 500년이나 지나야 이곳에 풀이 나고 인물이 나올 것이라 말해 그때서야 태종이 안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찌됐든 이후 회안대군의 후손들이 난을 일으키거나 왕위에 앉지 않았으니 태종의 예방책이 효과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묘를 뒤로 한 채 내려오는 길엔 갖가지 생각이 든다. 한때는 조선왕조를 호령했을 위치에 있었건만 권력 다툼에 패하면서 비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동생 이방원에 가려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회안대군은 불운의 대군임에 틀림없다. 동생에게 쫓겨 유배지를 전전하다 죽어서도 자신의 묘 근처의 혈자리가 끊기는 운명이 야속하기만 하다. 역사엔 만약이 없지만 만약 이방간이 이방원을 이겼다면 그는 조선의 왕이 됐을 뿐 아니라 이곳도 묘가 아니라 능이 됐을 거란 생각도 든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 인생이란 종이 한 장 차이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 새삼 뼈저리게 느껴진다. (조석창(글)/ 전북중앙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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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향의 고장 전북『전라박물지全羅博物誌에서/ 2017. 11. 30. <시간의 물레>펴냄

 * 최승범/ 전북 남원 출생, 시인, 문학박사, 1958년 『현대문학』으로 시조부문 등단, 시집『난 앞에서』『가랑잎으로 눈 가리고』등, 일본어역 시집 『자연의 독백』등, 전북대 명예교수, 고하문학관 관장, 가람시조문학상 등 다수 수상

 * 조석창/ 중앙대 신문방송 졸업, 전북대 신문방송 대학원 수료, 현재 전북중앙신문 문화부 근무, 2015 전북 기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