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수필 읽기 16 / 이태동>
첫 키스
안톤 슈나크Anton Schnack(1892~1973, 81세)
이제는 이름도 잊어버리고 얼굴 모습도 기억에 없는 소녀여. 나는 너와 첫 키스를 했다. 네 입술은 미처 화장도 하지 않고 뚜렷한 모습을 갖추지 않고 있었고, 나의 것도 분명히 다를 바 없이 이제 성깃성깃 수염이 나기 시작한 고집 센 소년의 입술이었다. 그때까지 가슴을 꿰뚫는 정열적인 사랑의 고백을 해 본 적도 없고 다만 어느 라틴 작가가 쓴 순환문循環文을 더듬더듬 낭독하거나 특별히 악센트가 있는 교과서 시구詩句를 위해서나 사용된 입술,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고 휘파람을 불 때나 써 먹은 입술, 아침 커피를 급하게 훌쩍거리며 마실 때나 사용되었을 뿐인 입술이었다.
우리는 프랑켄주州의 작은 도시 눅눅한 냄새나는 어느 좁은 골목에서 서로 어떤 특별한 관심을 나타낸 적도 없는 상태로, 그야말로 하루같이 만났다. 하기야 나는 겨울이면 네게 눈뭉치를 던졌고 여름에는 낡은 자전거펌프로 물벼락을 뿌린 적이 있었지만.
너는 아마도 금발머리를 땋고 있었던가. 아니면 챙 넓은 물빛 모자 밑으로 집시풍의 까만 곱슬머리가 구불거렸는지 그랬던 것 같다. 너는 여름날 저녁 일정한 시간이 되면, 박공이 있는 그 높은 목조건물의 창가에 모습을 나타내어 조그만 초록빛 물뿌리개로 자란紫蘭과 푹샤(남미가 원산지인 관상식물-역주)와 베고니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고, 나는 대체로 이 무렵에 책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거나 흙으로 더러워진 손에 한 다발의 투척용 장대를 들고 그 집 앞을 지나다녔다. 봄이 되면 풍뎅이를 떨어뜨리려고 어린 밤나무를 흔들어 대던 소녀의 손, 가을로 접어들어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호두나무 꼭대기에다가 짧은 몽둥이를 던져서 노획한 호두 껍데기가 묻어 갈색과 초록으로 얼룩진 손, 널찍하게 줄이 쳐진 종이에다 붉은 잉크로 삐뚤삐뚤한 시구詩句를 써서 돌돌 말아 조그마한 돌멩이에 붙여 묶어서는 여학교의 열린 창으로 띄워보냈던 손. 이 손이야말로 어느 가을의 한낮, 네가 어둠침침한 현관으로 들어섰을 때, 대담하게도 네 어깨인가 가랑머리인가를 움켜잡은 바로 그 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서서 현관문을 빠져나가 한길로 도망을 칠 참이었다. 그때 나로서는 이상스럽게 여겨지던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너는 반항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다정스럽게 내 목에 팔을 감으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독점을 하려는 듯한 몸짓, 이런 포옹은, 하기야 너무나 성급하고 서투른 것이라서 그렇긴 했지만, 미지근하고 축축한 키스의 맛보다 한결 나를 흥분시켰다. 계단에서 누구인가의 음성과 발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나는 그 자리에서 뺑소니를 쳤다.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안고 골목 안에서 떠들썩하며 노는 아이들 틈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동안 너는, 아마도 달아오르는 얼굴의 홍조와 가슴의 동요를 증발시키기 위해서였겠지만, 여전히 어두컴컴한 곳에 머물러 서 있었다.
그때 너는 어떤 젊은이라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너랑 부딪치기를 번번이 회피했다. 네가 이상스럽게 다정하게 팔을 벌려 오던 일을 상기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너의 흔적은 내게 있어 타인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이 첫 키스에 이어 다른 입술과의 키스들이 뒤따랐다. 가슴을 꿰뚫는, 충분히 음미하는 오랜 입맞춤들이. 첫 키스에 다정스런 포옹이 동반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저 무의미하고 지각없는 사건으로 흘러가 버렸을 것이리라. 나는 이 몸짓에서 자신을 바치고 싶은, 자신을 또 다른 나에게 흡수시키고 싶은 욕망과 의지를, 희미하지만 무의식중에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당시의 내 둔하고 오만한 어린 마음으로는 전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경아 · 이태동 역)
---------------
*『문예바다』 2017-가을호 <해외 수필 읽기 16>에서 *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명예교수, 평론집 『나목의 꿈』『한국 현대시의 실체』등, 수필집『살아 있는 날의 축복』『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에세이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창공원/ 최승범(시) 조석창(글) (0) | 2018.01.05 |
---|---|
회안대군 묘/ 최승범(시) 조석창(글) (0) | 2018.01.04 |
북유럽 학교 탐방기/ 김재국 (0) | 2017.11.27 |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발명한 김제시민 정평구(2)/ 최상섭 (0) | 2017.11.17 |
대나무의 멋에 대하여/ 김창현 (0) | 2017.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