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정숙자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자작시집 엿보기

검지 정숙자 2017. 11. 24. 00:52

 

 

<『시에』2017-겨울호 / 자작시집 엿보기>

 

    발상의 문은 어디서 열리는가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파란, 2017)

 

    정숙자

 

   

  2012년 10월 17일 자정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그때 나는 읽은 책을 노트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경비원께서 묻는 것이었다. "이 댁에 연세 든 남자분이 사시는지 저기 쓰러져 계시는 분확인 좀 해보시지요." 바로 한 층만 더 올라오면 우리 집인데, 지그재그로 꺾어지는 계단의 좀 넓은 부분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잠든! 내 남편이었다. 우리 아랫집에서 쿵 소리가 가까이 울리자 문을 열어봤고 심각한 상황을 경비초소에 알렸으며, 경비원은 즉시 119를 부른 다음 보호자를 찾기 위해 집집마다 벨을 눌렀던 것이다. 신속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만취 상태였던 그는두개골이 파열되어 열흘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실족失足의 강을 건너고 말았다. 물론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그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 이튿날이 내 회갑, 또 그 이튿날은 삼우제였다.

 

  직각이 흐르네

  직각을 노래하네

  직각

     직각

        직각 한사코 객관적인

  도시의 계단들은 경사와 수평, 깊이까지도

  하늘 깊숙이 끌고 흐르네

 

  날개가 푸르네

  날개가 솟구치네

  다음

     다음

        다음 기필코 상승하는

  건축의 날개들은 수직과 나선, 측면까지도

  성운 깊숙이 깃을 들이네

 

  설계와 이상. 노고와 탄력. 눈물의 범주. 계단은 피와 뼈와 근면의 조직

을 요구하네. 인간이 만들지만 결국 신의 소유가 되는, 그리하여 쉽사리 올

라설 수도 콧노래 뿌리며 내려설 수도 없는 영역이 되고 만다네.

 

  바로, 똑바로, 직각으로 날아오른 계단은 자신의 DNA를 모두에게 요구

하네.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용치 않네. 가로, 세로, 직각으로

눈뜬 모서리마다 부딪치며 흐르는 물소리 콸콸 콸콸콸 노상 울리네.

 

  계단의 승/강은 눈 VS 눈이네. 한 계단 한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한눈파

는 눈으로는 안녕 불가. 생사의 성패의 지엄한 잣대가 계단 밑 급류에 있

네. 너무 익숙히, 너무 가까이, 너무나 친근히 요주의 팻말도 없이.

   -「액체계단」전문 

 

  곧 5주기가 다가온다.

  그가 떠난 후 나는 1년 동안 어느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그의 명복을 빌며 근신했다. 당시의 우울감이나 황망한 심정은 여타의 세상을 떠나 있었다. 여전히 조용히 책을 읽고 원고 청탁만큼은 수용했으나, 남편의 죽음을 '슬픔'이나 '쓸쓸함' '원망' 정도에 머무는 작품으로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한 사람의 목숨을 담보헸다고 할 만한 작품을 빚고자 했다. 그것은 내 잉크가 총동원된 한 편이어야 한다고 신에게 자신에게 주문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영감 자체가 스스로 싹을 올려줄 때까지 기다렸다. 정중동 정중동 그렇게 1주기가 다가올 무렵 「액체계단」의 구도가 서서히 틀을 잡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포스트모던(post modern)한 발상이나 표현도 경험과 연계된 사유에서 잉태되고 발아되며 수확된다.  칸트가 말한 선험조차도 절대적 선험이란 있을 수 없다. '선험先驗'에서의 '험'이라는 말 속에 이미 '실험'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현상과 현상학은 다르다. 현상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려면 인식의 차원을 지향해야 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인식을 문학적 장치로써 엮어내야만 한다. 남편의 생사에 값할 시를 구상함에 있어 비애를 붙들고 시름할 여유란 필요란 철벽 너머로 밀어두었다. 욕망의 계단, 사랑의 계단, 생명의 계단 등 우리의 이상과 현실 속 계단들을 분모로 설계하며 언어의 건축물 건축술을 이 한 편에 담고자 고심했다. 「액체계단」은 그렇게 감정을 압축한 밀도에서 탁마되었다.

  그리고 이번 시집의 표제로 연결한 또 한 편의 시「살아남은 니체들」은 "오른발이 타 버리기 전/ 왼발을 내딛고/ 왼발 내딛는 사이/ 오른발을 식혀야 했다"(제2연),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왼발과 오른발에 (끊임없이) 달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제4연) 등등 한 행 한 행이 니체의 괴로웠던 삶과 나 자신의 삶, 그리고 모든 고뇌하는 사람들의 삶을 아울러 표현코자 시도한 파편이며 얼룩이었다. 철학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진리와 모순의 관계를 응시하는 것이기에.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에 접어든 니체들의 술잔

마침내 도달해야 할 불/길, 속에서 달아나도, 달아나도 쫓

오는 세상 밖 숲 속에서.

   -「살아남은 니체들」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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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에』2017-겨울호 <자작시집 엿보기> 에서

  * 정숙자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뿌리 깊은 달』외,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