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뱀/ D.H. 로렌스

검지 정숙자 2017. 12. 5. 23:53

 

 

   

 

    D.H. 로렌스(1885-1930, 45세)

 

 

  한 마리 뱀이 낙수 대롱 밑으로 왔다

  어느 무더운 날, 나 또한 더위에 속옷 바람으로

  물을 마시러 거길 갔고.

 

  검은 기운에 싸인 우람한 캐럽나무의 현묘한 그늘로

  나는 물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조용히 서서 기다려야 했던 까닭은, 거기에 그가

  나보다 먼저 와 대롱의 물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스름한 토담 틈새에서 나와 거기 있었다.

  물받이 돌통 언저리에 매끈한 배로

  그의 황갈색 굼뜬 몸을 끌며

  돌바닥에 그의 모가지를 뉘었다.

  윗 대롱에선 영롱히 방울진 물이 떨어지고

  그는 곧게 내민 입으로 그 물 받는다.

  곱게 삼킨 물 잇몸을 지나 길게 늘어진 몸 안으로 흐른다

  침묵 속에서.

 

  나보다 먼저 누군가 내 물받이 통에 있었다

  그리하여 난 기다렸다, 두 번째 온 자로서.

  물을 마시다 그는 소가 그러하듯이 고개를 들었다

  물 마시는 소처럼 그는 물끄러미 날 응시하다

  입술 밖으로 내밀어 두 갈래의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 뒤 한동안 흥얼대다

  다시 고개 숙여 더 마셨다.

  지구의 불타는 함지에서 나온 그는

  흑갈색인 듯 흙빛 나는 황금색이다.

  시칠리아의 칠월 어느 날에 에트나 화산은 연기에 휩싸이고.

 

  가르침을 담은 교육의 목소리가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쳐댔다.

  시칠리아에서 까만 뱀은 해롭지 않지만 황금 빛깔의 뱀은

  치명적인 독사라는 이유로.

 

  덩달아 내 마음의 소리도 내가 만일 버젓한 사내라면

  몽둥이 들어 당장 눈앞의 뱀을 쳐 죽이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얼마나 좋아했던가를 고백해야 한다

  내 물 대롱에서

  물을 마시고 평온한 그곳에서 감사의 몸짓도 하지 않고 떠나

  이 땅의 불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그가

  다소곳한 손님처럼 왔던 사실에 나는 얼마나 가슴 벅차했던가?

 

  내가 겁쟁이라서 감히 그를 죽이지 못했던가?

  내 성미가 괴팍해 그에게 말을 걸고자 했던가?

  내가 겸손하여 마땅히 존경받을 만했는가?

  난 스스로 존경받을 만했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다시 그 훈계의 소리가 들렸다.

  네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넌 그를 죽였을 거야!

 

  난 정말로 두려웠다. 어쩔 수 없이 두려웠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은밀한 지구의 어두운 문을 뚫고 나온

  그가 내게 온정을 간구하다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존경받을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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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영국 소설가, 시인 겸 비평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그의 성철학(성철학)을 펼친 작품이며 외설시비로 오랜 재판을 겪은 후 미국에서는 1959년에, 영국에서는 1960년에야 비로소 완본 출판이 허용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중편 및 단편소설, 시집, 여행기, 평론집, 서간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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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석주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세계 명시 100선』에서/ 2017.3.30.초판1쇄-2017,4,17.초판2쇄 발행, <북오션> 펴냄

  * 장석주/『월간문학』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79년『조선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집『몽해항로』『일요일과 나쁜 날씨』등 많은 저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