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새해를 맞으며_야누스의 심정으로/ 강기옥

검지 정숙자 2017. 10. 30. 00:02

 

 

    새해를 맞으며

       -야누스의 심정으로

 

     강기옥

 

 

 

  신화를 말할 때 우리는 쉽게 그리스 · 로마 신화를 떠올린다.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이 이름만 바뀌어 로마 신화의 주인공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로마신화에만 등장하는 신이 있다. 야누스(Janus)다. 요즈음 의학 용어로 풀이하면 앞뒤에 머리가 둘 달린 샴쌍둥이다. 이들은 로마 중심지의 신전 문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는데, 여기에서 연유하여 로마는 평화시에는 문을 닫아놓고 전생시에는 문을 열어놓았다. 이는 전쟁과 평화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야누스의 이중성 때문이다. 로마시대의 전쟁신이 이제는 혼란과 질서, 강경과 유연, 앞과 뒤를 나타내는 양면성의 대상으로 바뀌어 우리와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강한 성격에 약한 면도 있는 사람, 또는 그런 류를 '야누스적인 사람'이라 한다.

  이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아 1월의 의미를 새겨볼 때다. 지나간 것을 잊고자 하지만 그것이 어디 두부 잘라내듯 쉽게 잊을 수 있는가. 아니 잊어서도 안 된다. 지나간 세월은 오늘의 교훈이기에 가끔 되돌아보며 오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새로 밝아오는 새해는 나에게 어떤 날들일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신중하게 생각하며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1월을 January라 했다. 야누스의 이중성에서 1월의 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새해를 신중하게 맞이하라는 뜻의 2중성이 곧 Janus의 January인 것이다. 샴쌍둥이 중에서 뒤를 향하고 있는 머리는 지나간 날을 회상하고, 앞을 향하고 있는 머리는 다가올 날들을 대비하는 신중한 삶의 자세가 곧 1월을 맞는 마음인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신화가 있다. '삶의 본질이 신화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로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정의할 만큼 신화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의 삶을 아우르는 신화, 그것은 이미 친숙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옛날 이야기처럼 들어온 설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 그런 신화는 은연중에 영향을 끼치며 사람들의 가슴에 추억처럼 따뜻한 온기로 남아있다. 그래서 어떤 신화를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 사람의 격과 질이 달라진다.

  서양인들이 그리스 · 로마 신화에 의해 그들의 예술적 삶을 풍부하게 했다면 동양에서는 각 나라마다 마을마다 다른 신화와 전설에 의해 세시풍속을 이루어 격에 맞는 생활을 해왔다. 종적으로 신과 조상님께 제사지내고 횡적으로 계절마다 어울리는 민속놀이를 통해 끈끈하게 정을 맺고 살아왔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우리 조상님네의 여유와 멋을 찾을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이 야누스적 이중성으로 새해를 맞이할 때 우리는 어떻게 새해를 맞이했을까. 그것을 알고 보면 동서양 사람살이가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한지 감탄사가 절로 난다. 새해가 밝으면 한동안 잊었던 원단(元旦), 정초(正初), 세수(歲首), 연두(年頭), 신정(新正) 등의 용어가 갑자기 도깨비 시장판처럼 통통 튀어나온다. 그런데 '설날'은 저만큼 뒤로 밀려 있다. 신정(新正)과 구정(舊正) 때문이다.

  신정, 구정은 우리 민족이 사용하던 용어가 아니다. 음력 정월 초하루를 '설날'이라 하여 명절로 지키는 우리의 풍속을 지워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조립해낸 말이다. 새해를 맞으며 한자 단어의 고상한(?) 말보다 '설' '설날' '설날 아침'이라고 하면 그 난삽한 한자어 모두를 포장하고도 남는 정겨운 맛이 있다. 우리말에는 그렇게 감칠맛 나는 민족의 정서가 묻어있다. 신정은 양력이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오랜 세월 우리 조상 대대로 사용하던 설날이 구정물 냄새나는 구정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설'은 다름아닌 서양의 January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설'의 어원은 여러 가지에서 찾는다. '나이가 한 살 더 들었다'의 '살'에서 비롯되었다는 경우와 '서럽다'의 '섧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경우, 그리고 '낯설다'와 같은 '설'에서 비롯되었다는 경우 등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모두 의미 있는 유츄이기에 이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무엇보다도 신일(愼日)이라는 '삼가다'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제격이다. 음운론적 이론보다는 세간(世間)의 의미로 풀어내는 것도 재미있는 접근이기에 우리말의 '설'이 지닌 야누스적 의미를 알아본다.

  샴쌍둥이의 뒤를 보고 있는 머리는 '섧다'의 '설'에서 비롯되었다는 경우에 비견된다. 지난날을 후회하며 아쉬워하는 마음이 일치한다. 밝아올 새날을 신중하게 맞이하는 몸가짐은 샴쌍둥이의 앞을 보는 모습이다. 정확히 야누스적 뜻을 지닌 용어다. 새해를 맞으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아쉬움이나 그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찾으려는 마음은 동서양이 다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또 다른 하나가 있다. '설'은 원단(元)에서 보듯 으뜸이라는 의미가 있다. 일 년 중 으뜸인 날, 으뜸인 달, 으뜸인 계절인 것이다. 모든 것이 으뜸이라면 으뜸으로 반성하고, 으뜸으로 준비하고, 으뜸으로 계획을 세우는 한 해의 출발인 것이다.

 

  우리에게 설날은 그저 지구의 자전에 의해 밝아온 날이 아니다.

  '새 날에는 새 태양이 뜬다'는 신념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창조해 낸다. 새해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새로운 출발로서의 새 날인 것이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신화를 써야 한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신화를 써야 한다. 신화를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인간이기에 우리가 차라리 우리의 신화를 창조해야 한다. 그것이 새해를 맞는 각오이자 지난해를 결실하는 아름다운 삶이다.

 

  * 1월을 야누스에 비견한 것은 미국의 자존심이라 하는 과학자 SF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말로 굳어진 용어다. 시저가 율리우스력을 제정하기 전에는 3월이 일 년의 시작이라서 January는 11월이었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를 보는 야누스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허구다. 작가가 상상력으로 지적한 말이 시대적 감각에 맞아 일반화된 용어로 한 사람의 견해가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다.

  참고로 시저가 율리우스력을 채택할 때 7월의 명칭은 퀸틸리스(Quintilis), 8월은 섹시틸리스(sextilis)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율리우스 시저(Gaius Julius Caesar)가 자기 이름을 따 칠월을 줄라이(July)로 바꿨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역시 자기 이름을 따 팔월을 오거스트(August)로 바꿨다. 더불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8월이 30일로 7월보다 하루가 적은 것을 보고 2월에서 하루를 취해 31일로 바꿨다. 그래서 7월과 8월이 똑같이 31일이고 그로 인해 2월이 28일로 줄어들었다. 서양의 달력은 과학성 위에 비과학성도 내재한 권력의 산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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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칼럼『칼을 가는 남자』2011. 9. 20. <도서출판 가온>펴냄

  * 강기옥/ 한국문협 문학유적탐사 연구위원장, 칼럼니스트, 시집『오늘 같은 날에는』『그대가 있어 행복했네』등, 평론집『시의 숲을 거닐다』, 역사인문교양서『문화재로 포장된 역사』, 문화재 답사기『국토견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