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자卍字의 말씀
함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자설卍字說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부르게 된 까닭은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은 卍이라는 상징기호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의미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호의 발생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기원이 문자, 음악, 미술 같은 여느 기호보다 더 오래된 것으롤 추정되고 있고 우주나 삶에 대한 심오한 관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향상화한 종교, 철학적 심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화엄경음의華嚴經音義>에 따르면 卍이 중국에서 문자가 되어 자전에 등록된 것은 당대 측천무후 장수長壽 2년인 서력 693년의 일로, 소리는 만萬으로 읽고 뜻은 "상서로운 온갖 덕이 응결된 곳"으로 하기로 했다고 한다. 뒤로는 가슴만 또는 일만만으로 읽히게 되었다.
卍을 산스크리트말로는 "스와스티카(Svastika) 라 하는데 이 말은 길상吉祥이나 기쁨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모양새에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도는 우만자와 좌만자 두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오른쪽으로 도는 모양새를 중국에서는 왼쪽으로 도는 모양새를 주로 쓰고 있다. 부처님꼐서 첫 가르침을 펴신 사라나트 녹야원에는 아쇼카대왕이 세운 큰 탑에 새겨져 있는 卍의 모양새는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다. 어쨌든 그 모양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공時空을 들이삼키고 토해내는 회오리바람 같기도 하고 해맑게 피어오르는 빛샘 같기도 하고, 거대한 오로라의 소용돌이 같기도 하여, 그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절로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기도 한다. 하기는 내가 인도 여행을 할 때 읽은 어느 책에서는 卍을 '기쁨의 샘', '우주의 기원', '창조와 소멸의 에너지' 같은 뜻으로 풀이했던데 만약 이 말이 옳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이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卍을 부처님 마음, 곧 불심을 상징하는 기호로 삼고 있다. 그래서 법당에 모시는 부처님 가슴에는 '卍' 문양이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화엄경』에 보면 "여래의 가슴에는 거룩한 분의 특징인 '卍' 문양이 있는데 이것을 길상해운吉祥海運이라 한다"고 했고 또 같은 경에는 "뭇 사람들이 卍자 가슴털 얻기를 원합니다.願一切衆生得如卍子髮"라는 말씀도 있다. 불교인체생리학에서는 사람의 의식과 몸이 함께 공명하는 다섯 부위에 대헤 말하고 있는데 가슴 부위를 심륜心輪이라 부르고 이 심륜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을 묘한 기쁨 곧 묘희妙喜라고 이르고 있다. 묘희란 더 말할 것도 없이 나만을 키워가는 삶의 기운이 일시에 바뀌어 모든 경계에 마음을 열고 삶의 고락을 편히 주고받는 자비심의 다른 이름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자기 모습니다 지고한 삶의 기쁨을 불교에서는 卍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卍'이라는 상징기호는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도의 오래된 종교인 힌두교, 자이나교에서 이 기호를 사용해 왔고 나아가 아리안족이 조상인 유럽의 이곳저곳과 심지어는 아리안족과 관계없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도 신성, 창조력, 행운, 승리 같은 의미를 불어넣어 널리 써온 것이 사실이다. 히틀러는 '卍'의 모양을 변형시킨 '하켄크로이츠'를 만들어 나치당의 심볼로 삼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조상인 아리안족의 옛 영화를 되찾자는 정치구호가 담긴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십자가, 칼, 장식물, 정치이념 같은 것에 한정된 서양에서의 쓰임새와는 달리 인도에서는 불상이나 신상의 특정한 부위에 이 문양을 써왔다는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슴 부위뿐만이 아니라 손바닥 발바닥에도 이 문양을 표시해 왔는데 이것은 다른 종교나 문화권에는 없는 매우 이래적인 일이라 하겠다.
'卍' 문양이 왜 부처님의 가슴이 아닌 부처님의 손발에도 나타나 있을까? 이것은 분명 공안公案은 아니지만 두고두고 깊이 사유해볼 만한 의미심장한 주제가 됨직하다. 더구나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만자설卍字說'이라고 한 것과 관련해서 이것을 사유해 들어가면 돌연히 말길과 생각의 길이 막히는 재미가 자못 화두를 참구하는 그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까지 한다. 말이란 으레 입으로 하는 것이기에 입이 없는 가슴이나 손발로는 어떤 말도 벙긋할 수 없겠으니 이것만으로도 향엄香嚴선사의 '구함수지화口銜樹枝話를 머리에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겠는가.
언어와 문자는 한갓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모든 기호는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실물 그 자체는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은 언어의 한계와 허구성에 대해 "개는 짖어도 개라는 단어는 짖지 못한다"라고 꼬집어 말하기도 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뗏목의 비유를 들어 이와 같은 이치를 명료하게 밝히신 바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마음 한구석에 '卍'이 단순한 기호 이상의 의미를 지닌 무엇이기를 믿고 싶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바람은 '卍'은 보신 부처님의 과덕果悳의 결정체를 시각화해서 나타낸 것으로 이것은 단순히 언어가 지시하는 일반적인 사물이거나 관념과는 뭔가 다를 것이라고 여기는 애틋한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卍'이 부처님의 과덕을 세상과 매개하는 신령한 힘이 되기도 하고 기호를 넘어선 기호로 신성시되기도 한다.
하고 싶은 '卍'에 대한 현학풍玄學風의 담론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가슴과 손발에 이룬 과덕을 왜 '부처님의 말씀'이라 했는지에 대한 보다 실감實感나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지적 모색과 종교적 상상력이라는 - 전통수행 측면에서 보면 자못 저급하고 위험하게까지 보일 수 있는 - 인식 방법을 동반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이런 식의 이야기가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와 같은 일련의 노력이 법인法忍 곧 진리를 참아 견디는 삶을 얻는 길에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서이다.
인도는 계급사회를 구조화시켜온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다. 혁명 이전 앙시앵레짐(낡은 체제)으로 일컬어지는 옛 프랑스 사회처럼 인도 사회는 크게 성직자, 군주, 자유인으로 나뉘어졌었고 거기다 이 세 계극ㅂ을 떠받들고 먹여 살리는 다수대중인 천민계급이 존재해 왔다. 인도 상층계급은 천민들의 존재 의미를 사람의 손발에 빗대었는데 부처님 손발에 '卍' 문양이 있다는 것은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생노병사를 나투신 부처님의 삶의 의미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 아는 것처럼 불교의 고갱이는 지혜와 자비라 하겠는데 예로부터 불교교학에서는 눈은 지혜, 가슴과 손발은 자비방편을 상징하는 신체부위로 일컬어 왔다.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이 천의 손을 갖추고 있음은 이것을 반영해 주는 좋은 보기라 하겠다. 그러니 부처님의 손발에 '卍' 문양이 있다는 말은 끝없이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삶의 기쁨이 단지 마음만이 아닌 손과 발을 통해 아침 햇살처럼 세상으로 번져나가는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적확하게 드러내 부인 매우 극적인 증언이라 하겠다. 또한 이것은 입으로 하는 설법이 아니라 가슴과 손발로 하는 말없는 설법이라야 진정한 설법이라 할 수 있다는 단호한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가禪家에서 쓰는 말에 '역만자행逆卍字行', 순만자행順卍字行'이 있다. 역만자행이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둘레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수행에만 전념하는 삶을, 순만자행이란 깨달음을 이룬 뒤 중생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삶을 이르는 말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위타지학爲他之學'이라 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시해야 할 것은 역순逆順과 기타己他의 상호관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들은 결코 나뉠 수 없는 한 몸의 관계라는 점이다. 아무리 자기만을 위해 살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 없고 아무리 이웃만을 위해 살려고 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삶의 실상이다. 생명체와 삶터 자체의 됨됨이가 본디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진실에 대한 큰 개안開眼을 통해 실체를 고집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깨어있는 삶의 실천, 다시 말해 모든 존재와 더불어 크게 공명하는 아름다운 삶의 흐름을 일러 자비행 곧 만자행卍字行이라 한다. 만자설법卍字說法 또한 이와 같이 본래 그러한 삶의 바탕에서 끝어벗이 뭇 삶에게 공양 올리는 실천 일반을 가리키는 말임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시대 민중과 더불어 우리는 어떤 말과 어떤 마음을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법문이 묘연하기만 하여 卍 자 문양이 인두 자국처럼 붉게 찍힌 부처님의 가슴과 손발을 끝없이 그려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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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야나』2017-가을호 <승려 문인 특집 / 에세이 부문>에서 * 함현/ 조계종 5교구 황매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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