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완성을 향한 단독자의 자유의지
-정숙자의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김윤정/ 문학평론가
1. 운명의 주름과 주체의 능동성
한 개인이 다른 개인과 다른 것은 그에게 발생하는 사건이나 운명, 지각작용, 욕망 등의 복합적 차이들에 기인한다. 존재는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의식만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포함하거니와, 신체와 의식은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서 타자와 구별되는 개별자를 형성한다. 더 이상 나눌 수도 없으며 타자와도 구별되는 개별적 자아는 단독자*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면해야 한다. 단독자는 자기 내에 주름 접힌 채 포회되어 있는 운명을 바탕으로 세계와 부딪치고 사건을 겪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자아는 라이프니츠의 관점대로 신에 의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는 결정론과 자아의 주체적 의지 사이에 걸쳐진 채 삶을 영위해 가도록 되어 있다.** 인간에겐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신체적 · 환경적 조건과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그러한 조건을 넘어서는 주체적 정신 작용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결정론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어디까지이고 인간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어디부터인가?
* 단독자(monade)는 라이프니츠의 용어다. 「모나드론」에서 라이프니츠는 세상을 구성하는 실체이자 단위(unity)를 모나드라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 순수하고 단순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때문에 일자(the one, 一者), 단독자(單獨者)라 번역되는 Monade는 더 이상 나눌 수 없고 또 다른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포를 지닌다. 이정우, 『주름, 갈래, 울림, 거름, 2001, pp. 19-25.
** 이 글은 라이프니츠의 단독자의 개념을 출발점으로 하면서 은연중 두 철학자 라이프니츠와 칸트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면서 쓰여질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단독자라는 유연한 개념을 제시하였음에도 인간과 세계가 신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예정조화설을 이야기한다. 반면 칸트는 결정론을 부정하고 인간의 주체적 의식을 강조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중세 이후 근대 관념철학이 탄생 발전해가는 장면을 환기시킨다. 칸트야말로 근대 주체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 두 철학자들 사이의 거리는 운명에 구속당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찾아 헤매는 방황의 너비와 일치한다. 정숙자론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내용도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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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자의 9번째 시집인 이번 시집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시인 스스로 인간을 지배하는 삶의 객관성이 어디까지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주관성이 어디서부터인지를 ‘철저하게’ 가늠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철저하고도 치열하게라고 말했거니와 이 점은 그의 시가 순간적인 감동이나 정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냉철한 오성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시집에서 그가 보여주는 주제는 일차적으로 인간을 둘러싼 조건에 관한 객관적 인식이다. 인간에게 결정된 운명은 과연 있는 것인가. 우연한 사고는 어떻게 다가오며 인간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등은 그의 시에서 감성에 의해서가 아닌 논리적 지성으로써 사유된다. 이 속에서 그가 규명하는 인간 조건은 우주적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아우르게 된다.
인간의 주어진 조건에 관한 탐색이 객관성의 측면이라고 한다면 주관성의 측면은 그러한 인식을 전제한 후에 펼쳐진다. 시집의 또 다른 주제가 이 부분인데, 그것은 정숙자 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과 자유에의 의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의 의지의 주관성은 가장 참혹한 사건과 운명에도 불구하고 발휘된다. 매우 혹독한 이성에 의해 기능하기 마련인 그의 주관적 의지는 자신에게 닥친 어떤 가혹한 시련 앞에서도 잦아들지 않는다. 기계처럼 강력한 의지를 통해 시인은 주어진 조건에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는 대신 그것을 부수고 초월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초월은 우주의 한가운데서 볼 때 어디쯤에 이르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존재의 근거로 작동하는 시공간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을 둘러싼 객관적 조건을 넘어서는 실제적이고 주체적인 힘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의 뜻일까 아니면 그의 강인한 자유의지 탓일까?
2. 단독자로서의 인간의 조건들
라이프니츠는 인간이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순수한 실체를 모나드라 하면서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소와 같다고 하였다. 모나드는 전체적 유기체인 대자연의 부분이자 그 자체로 통일된 원리를 따르는 유기체이다. 라이프니츠는 단자인 모든 사물들이 목적 지향적인 유기적 원리에 따라 작용하며 각자의 동일성을 확보한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주체와 개인을 강조하던 근대의 철학 상의 기류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라이프니츠는 의식과 의지를 사유의 중심에 두었던 당시의 관념철학자들과 다른 과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는데 그것은 그가 모나드론을 통해 인간의 객관적 조건을 탐구하였던 점과 관련된다. 그는 각각의 단자가 자신의 신체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법칙으로부터 영향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언급하는 일은 정숙자 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한 요령을 제시한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하였던바 인간 조건에 관한 시인의 객관적 탐구 자세에 기인한다. 정숙자 시인이 보여주는 과학적 지식에의 열정은 이러한 정황과도 연관되는바, 그가 고찰하는 인간의 객관적 조건은 엄정한 현대 과학의 성과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개인을 절대적 고독의 실체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단순 실체로서의 모나드의 외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시인의 “그는 그를 만든다. 타인은 그의 공간에 겹칠지언정 그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절름발이 바다」)라든가 “공간과 공간들, 한 칸 한 칸 그 모두가/ 독특한 색과 소리와 내면을 지닌/ 유일 공간”(「인칭공간」)이라는 언급들은 ‘타자가 출입할 수 있는 창’마저 부정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이 규정하는 인간의 일자성一者性은 여러 시편에서 반복되고 있다.
* 조지 맥도날드 로스, 『라이프니츠』, 문창옥 역, 시공사, 2000, p.127.
** 위의 글, p.142.
*** 라이프니츠, 「모나드론」, 이정우 역, 앞의 책,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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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잎 모두 잔잔하건만, 한 기둥에 난 잎들이건만 한 잎 한 잎… 무엇이 다
른 한 잎들일까? 제각각 다른 하늘 노 젓는 딴 잎들일까
이 또한 아랑곳없는 투명이로다
지금껏 그래 왔다면, 장차 어떤 잎이라 해도 저리 혼자 여위는 날, 캄캄한 날,
흐느끼지 않을 수 없는 날 끊임없이 닥칠 수 있단 말인가
먼 데서부터 악몽이 꿈틀거리면
그 둘레가 점점 좁혀져 오면
혼자, 몹시도
흔들리는 나뭇잎 아래
나이테 사이사이 잠 못 드는 눈
꽃 한 송이 맺히기가 어디 그리 쉽던가요?
나무는 제자리서 그렇게 먼 길을 가고…
-「각자시대」부분
인간이 세상에 던져진 고독한 존재라는 관점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한 이래 보편화된 생각이고 현대인의 일반적 조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각자시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비단 고독한 현대인의 실존에 관련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시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대로 ‘한 잎’이 겪는 불안과 아픔, 열정과 좌절 등의 실존적 정황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대신 위 시는 개인의 절대적 일자(the one)에 애한 인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기둥에 난 잎들이건만 한 잎 한 잎’이 ‘다르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단독자’로서의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각각 다른 하늘 노 젓는 딴 잎들‘은 단독자의 철저함을 암시한다. 단독자는 외부와의 영향이나 타자와의 소통이 철저히 차단된 순수한 단순 실체인 까닭이다. 이러한 단독자의 개념을 통해서 개인의 통일성과 개체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위의 시에서 제시하고 있는 ’아랑곳없는 투명‘이라든지 ’꽃 한 송이‘를 위한 완성에의 지향성은 모나드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나타낸다. 단독자로서의 인간은 유기체다운 내부 동인에 의해 완성을 추구해 나간다. ’나무는 제자리서 그렇게 먼 길을 간다’는 위 시의 언급은 곧 타자와의 결탁을 배제한 자아의 순수한 일자적 삶을 지시하고 있다.
인간을 규정하는 이와 같은 시인의 인식은 실제로 「무중력 상태로의 진입을 위한 밤들」에서 ‘단독자’라는 명칭을 얻고 있다.
예민銳敏은 차원입니다
걸핏 통증을 일으키지만 추스르고 나면 궤도가 되기도 하죠
싸락눈 들이치는 텅 빈 밤
창가에 놓인 촛불을 보았습니다. 촛불은 새어 드는 바람결 따라 (어쩔 수 없
이) 흔들렸습니다. 조금씩 휘청거리다가 긴장하다가 까무러치다가 문득 일어서
기도 하더군요. 그리고 그 무너짐은 날이 샐 때까지 반복되었습니다.
촛불은 단독자였습니다
제 안의 자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연해-연신 애끊었지만
그는 기류를 사랑했습니다
무엇이 들이치더라도… 눈금만큼이라도 덜 자극받는 촛불이 되려고… 무척
이나 많은 밤을 축냈습니다. ‘예민’은 미래의 개입입니다. ‘섣불리 흔들리지 말기
를’ 간곡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하지만 어디 그 일이 수월할까요?
-「무중력 상태로의 진입을 위한 밤들」부분
흔히 외로움과 고독, 불안을 상징하곤 하는 ‘촛불’이 위의 시에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위의 시에서 ‘촛불’이 그저 세상 속에서 피동적으로 놓여 있는 무기력한 개인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궤도’를 찾고자 하는 능동적 존재로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촛불’은 세상의 험악함 앞에서 흔들리다가 결국 스러질 운명을 지니는 존재가 아니라 ‘현기증 넘은 빛으로 창가의 밤들을 지켜낼’ 창조적인 존재다. 그것은 타자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으며 자신의 내적 동인을 바탕으로 세계 속에 자신을 실현시키는 능동적인 개체가 된다. 그러니까 위 시의 초점은 ‘바람결 따라 흔들리다가 휘청거리다가 긴장하다가 까무러치다가’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무너짐을 반복’하면서 ‘일어서는’ 존재, 즉 자체 내에 능동성과 창조성의 동인을 내포함으로써 우주 속에서 항구적인 실체로서 헌신하는 존재에 놓여 있다. 그것이 곧 ‘단독자로서의 촛불’인 것이다.
이러한 단독자는 타자와의 부대낌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는 세계 속에 당당히 자기 ‘궤도’를 지니게 된다. 그는 역시 유기체인 전체 우주의 법칙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유지해가는 존재다. 그러나 이러한 모나드에게도 타자와의 접촉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시에서는 늘상 자극에 노출되어 있는 ‘예민’한 자아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아는 타자의 영향력을 줄이고 ‘눈금만큼이라도 덜 자극받는’ ‘수월하지 않은’ 길을 위해 구군분투하기도 한다. 시인이 ‘예민’한 ‘차원’이 된다고 말한 것은 단독자와 타자 사이의 거리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은 ‘예민’한 감각을 실존주의적 조건이라기보다 통일적 개체라는 모나드의 측면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민’함이라는 조건은 세계에 무방비로 피투된 자의 약점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자기다운 궤도를 운행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즉 ‘차원’의 구별은 자아와 타자와 자신을 구별 짓고 평균적인 인간들로부터 초월하고자 하는 소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시인의 믿음에 의하면 ‘차원’을 달리하는 자들이야말로 변화와 창조를 실현하는 자들이자,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단독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특정한 궤도와 또 다른 차원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 시에서처럼 자아의 능동적 태도와 의지에 의한 것인가? 개인의 삶의 현상들은 이처럼 자아의 주관적 의식에 의해 작동될 뿐인 것인가? 바로 여기가 시인의 객관성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며칠 전 투신 자살자가 행인을 덮쳐 두 명이 즉사했다…는, 그 어처구
니를 설명할 길이란 부재. 우연이라고 밀어붙여도 석연치 않다. 천 년 전
에 출발한 시간과 시간이 된통 엉킨 거라고 밖엔….
시간에도 관성이 있는가 보다
천 년을 달려온 속도와 방향이라면
휠 틈도 꺾을 수도 없는 거겠지
감각을 넘어선 그 시간의 실체가 바로
나, 자신의 신체 아닐까?
가령 어느 날 내가 죽었다 해도
나를 통과한 시간만큼은 더 멀리 가고 있을 거야
지구를 벗어난 어딘가로, 수수 광년 밖으로
거기 또 내가 서 있을지도 모르지
-「시간의 충돌」부분
나는 누구인가? 나를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가장 객관적인 것은 무엇인가? 위 시에서 시인은 ‘시간’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재의 ‘시간’은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먼 우주로부터 생기한 것이다. 우주로부터 시작된 ‘시간’은 끊어지지 않는 끈처럼 천 년의 시공을 뚫고 지나 와 ‘지금 이 순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성이 현재의 여기에 이르러 ‘나’를 빚었을 것이라고 한다. ‘나’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들, ‘꽃’과 ‘바위’, ‘살쾡이’ 등도 모두 언젠가로부터 시작된 시간이 ‘여기’라는 공간에 이르러 존재케 된 것들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물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결합체, 하나의 시공성이 된다.
시간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해명해 준다. 왜 ‘나’와 ‘너’의 운명은 그토록 다른 것인가? ‘너’와 ‘내’가 만난 것은 어떤 요인에서인가? 이 같은 인간사에 있어서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들은 그저 우연히 벌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시간의 충돌에 의해 이루어진 필연적인 것이라는 점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가령 ‘며칠 전 투신 자살자가 행인을 덮쳐 두 명이 즉사’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단지 사고이자 우연일 뿐인가 하는 것이다. 우주적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기 않다는 것이 시인의 대답이다. 시간이란 기원을 알 수 없는 채 뻗어 나와 나름의 ‘방향과 속도’를 달려 특정한 공간에서 돌기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돌기가 ‘나, 자신의 신체’를 만든다. 시인은 그것이 ‘감각을 넘어선 시간의 실체’라고 한다. 요컨대 ‘시간’은 자아의 신체와 운명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조건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불가역적인 시간성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당하며 그러한 시간성은 자아를 둘러싼 사건을 만드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신체를 형성한 시간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관통하여 곧장 우주로 빠져나간다. 시간의 화살이야말로 개인의 처지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휠 틈도 꺾을 수도 없이’ 직진하는 존재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시간은 세계를 형성하는 가장 객관적인 요소이다. 또한 이 점에서 시간은 ‘나’를 규정하는 가장 객관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시간에 관한 이와 같은 관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fact)로 여겨진다. 시간을 둘러싼 현대물리학 역시 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이 같은 성질이 우리에게 어떻게 표상되는 간에 시간에 관한 추상적 개념은 이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러하다면 인간이 가장 강력하게 구속되는 실체 역시 시간일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인간에게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 된다!
시인의 경우 시간에 관한 성찰은 개인의 삶을 형성하는 객관성에 대해 조명하는 것이다. 시간은 단독자로서의 개인의 일 요소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시인은 ‘시간’을 통해 개인이라는 단독자에게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의 주름 접힘에 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3. 객관과 주관의 융합과 초월
인간과 자연에 과학적으로 접근했던 라이프니츠는 인간 역시 곧 펼쳐질 요소들의 잠재태로 여겼다. 탄생하여 성장하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그에 의하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신체와 정신의 복합체이자 하나의 단위로서의 모나드엔 그의 운명과 사건과 지각과 욕망 등이 주름처럼 접혀 있으며 그것들은 곧 삶의 과정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은 신에 의해 이미 예비된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 이정우, 위의 책,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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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시간의 절대성을 이해할 경우 비단 창조주로서의 신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은 예비된 것이다. 시간이 신체를 관통하면서 돌기를 형성함은 인간의 운명이 불가역적으로 결정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때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맞닥뜨려야 하고 납득할 수 없는 사건에 무방비한 채 놓여 있어야 한다. 더욱이 우주로 향하는 시간의 화살이 인간을 끌고 날아가 버리는 날엔 인간은 그것에 저항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시인이 운명의 극복을 욕망하게 되는 것도 이 지점이 아닐까. 그가 인간의 객관성의 조건을 파악하고 이를 뛰어넘고자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부분, 정신과 영혼을 다하여 주어진 물적 조건들을 가로지르고자 하는 대목이 여기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는 그것을 ‘벗어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벗어남’에의 의지와 그것을 위한 방법 찾기의 충동들은 그의 시 곳곳에서 종횡무진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 발자국은 뜨겁다
그들이 그런 발자국을 만든 게 아니다
그들에게 그런 불/길이 맡겨졌던 것이다
오른발이 타 버리기 전
왼발을 내딛고
왼발 내딛는 사이
오른발을 식혀야 했다
그들에겐 휴식이라곤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도움이 될 수도 없었다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런 불/길이 채워졌기에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왼발과 오른발에 (끊임없이) 달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
우기雨期에조차 불/길은 지지 않았다. 혹자는 스스로, 혹자는 느긋이 죽
음에 주검을 납부했다… 고, 머나먼… 묘비명을 읽는 자들이… 뒤늦은 꽃을
바치며… 대신… 울었다.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에 진입한 니체들의 술잔 속
에서… 마침내 도달해야 할… 불/길, 속에서… 달아나도, 달아나도 쫓아오는
세상 밖 숲 속에서.
-「살아남은 니체들」전문
인간의 조건에 대한 객관적 탐색은 인간에게 삶이란 신에 의해 짜여진 결정론적 운명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신체와 영혼을 단일한 복합체로서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객관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능동선 이전에 인간은 시간의 법칙 속에 구속되어 있고, 창조성 이전에 인간은 물적 조건에 얽매어 있다.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두고 “내 자신이 내 형틀”이라고, “태어나기도 이전에 벌써, 나는/ 내 형틀을 낳고 형틀은/ 형량을 끌고 형량은 삶을 몰았다”(「객담 및」)고 말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 말하고 있는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는 고백은 인간이 처한 이 같은 객관적 조건을 암시한다. 시인은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고 토로한다. 어쩌면 실상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는 능동성과 창조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위의 시에서 시인이 언급하고 있듯 기껏해야 ‘오른발이 타 버리기 전/ 왼발을 내딛고/ 왼발을 내딛는 사이/ 오른발을 식혀야’ 하는 일 정도가 아닐까.
시인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행동은 니체의 영원 회귀의 철학을 상기시킨다.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긍정하고 영원히 되풀이되는 인간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인과성도 불가역성도 부정하는, 아니 시간의 축 자체를 거부하는 초월의 태도에 해당한다. 니체의 영원 회귀는 신에 의해 부과된 인간의 운명을 극복하는 생성과 창조의 방법이다.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수용해야 한다는 니체적 역설의 행위는 뜨겁지만 피로하게 느껴진다. 삶의 무게는 기꺼이 짊어지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은 삶을 정면에서 응시하기보다 회피하고 싶게 만든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불/길’이라는 위 시의 인식은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불/길’은 도달해야 하는 목적인 동시에 도달하기 위해 걸어가야 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불/길'은 형틀과 같은 인간 삶의 조건이자 그 형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삶의 과정과 목적이 모두 ’불/길‘인 까닭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미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은 숙명적으로 광기에 들린 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므로 왼발과 오른발에 (끊임없이) 달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의 인식은 인간이 스스로 과도한 자유의지를 발휘한다 해도 삶의 객관성 자체는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재차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결정론을 넘어서는 주체의식은 어쩌면 관념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무엇이고 손쉬운 것은 없는 것이며 저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없는 법이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죽음에 주검을 바쳐도’ 안 될 것은 안 된다는 이 도저한 허무와 운명 앞에서 인간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이러한 운명 앞에서 절망한 이가 어디 니체뿐이겠는가. 철학자들뿐이었겠는가.
흔들린다. 그 흔들림 하나가 쌓인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 흔들리지 않음 하나가 쌓인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린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은 사이에 반복이 자리한다
‘살다’를 흔들어 한 음절로 줄이면 삶
파자破字된 ‘사람’을 한 점으로 꾸려도 삶
그리고 모음 하나가 남는다
ㅏ,
홀로 선 ‘ㅏ’의 무게가 한쪽으로 쏠린다. 발목에 힘을 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땅에 꽂힌다. 지하세계. 공기가 어둠이다.
어둠? 함께할밖에. 그를 대면하고 풀어 가는 거기서부터가 진짜 삶일 수밖
에. 그게 곧 파자 이전의 성어로의 복귀 혹은 진일보.
절대로 흔들리지 않은
흔들릴 수 없는
사다리도 닿지 않는 거기서
새벽을 물어 가는 거다
뿌리를 세워 가는 거다
홀로? ‘ㅏ’는 홀로가 아니었다. 움 하나가 붙어 있었어. 방향을 틀면 그 움 하나
가 사람이라는 뜻도 받쳐 주었지. 움 하나가 시옷도 만들어 주고, 그 움 하나가
부처로의 출발도 가능하게 해 주었어. 무한수열의 단위, 나뭇가지의 배열이었던
거야.
싯다르타, 그는
흔들림과 어둠과 홀로를 수용한
누적의 용량이었다지
-「싯다르타」전문
인간의 운명에 관해 ‘싯다르타’가 보여주는 것도 절망의 깊이일 뿐이 아니겠는가. ‘싯다르타’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 또한 ‘사다리도 닿지 않는’ 아득한 초월의 높이일 뿐이다. 초월이란 그토록 불가능에 찬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싯다르타’에게서 시간의 역설을 본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의 무한반복에 의한 시간의 축적, 그것을 통한 시간의 ‘누적의 용량’이 그것이다. 이 역시 영원히 되풀이되는 삶을 또다시 되풀이하겠다고 말하는 니체적 역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궁극의 차원에서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에는 참과 거짓의 구별도 선과 악의 차별도 없다. 유의미한 것은 오로지 ‘어둠과 함께할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견딤과 수용의 자세일 터이다. ‘어둠’을 ‘불/길’처럼 감내하며 무한 시간을 반복하는 일, 그 피로하면서도 뜨거운 과정이 운명 극복의 길에 속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에서 오히려 희망을 구하고자 하고 있다. ‘새벽을 물고’ 뿌리를 세워 가고‘ 싶은 것이다.
한편 위의 시는 싯다르타가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의 과정에서 ‘ㅏ’를 얻게 되었다고도 말하고 있다. 시인에 의하면 ‘ㅏ’는 ‘사람’과 ‘살다’가 명사 ‘삶’으로 축약되는 과정에서 남게 되는 것으로, 그 ‘무게’로 어두운 ‘지하세계’에 ‘꽂혀’ 삶을 이끄는 요인이 된다. 즉 ‘ㅏ’는 점차 기울어지다가 ‘ㅜ’가 되어 땅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움’으로 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파자된 ‘ㅏ’가 ‘홀로’ 되었다가 ‘ㅜ’를 거치며 점차적으로 생성에 이른다고 하는 매우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움’이 ‘부처로의 출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시인의 언급에서 우리는 만트라(mantra, 眞言)를 의미하는 ‘옴’을 떠올리게도 된다. 불교에서는 ‘옴’을 ‘태초의 소리이자 우주의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이라 하여 꾸준히 암송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옴’은 싯다르타에게 ‘흔들림과 어둠과 홀로’의 소용돌이 속에서 ‘누적의’ 시간을 보다 잘 견디게 한 방편에 해당한다. 우주의 소리인 ‘옴’은 혼란의 굴레에 갇힌 단독자로 하여금 우주와 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자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요컨대 ‘ㅏ’는 ‘ㅜ’로 그리고 ‘ㅗ’로 이르는 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생성과 창조를 열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 자유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하는 의지는 매우 도저到底해서 우리는 시의 곳곳에서 모든 상황을 초인과 같은 강인함으로 뛰어넘고자 하는 시인의 매서운 정신을 만나게 된다. 특히 ‘죽음에게 주어진 방점이란…/ 역시 완벽한 피리어드죠’(「절망 추월하기」)라든가 자신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의 맛을 반추하는’ 것(「나는 죽음을 맛보았다네」) , ‘이제 프로니까 프로답게 죽어야겠다’(「나는 죽음의 프로다」)고 하는 장면에서처럼 ‘죽음’을 공포로서가 아니라 삶의 일 과정 정도로 처리하는 시인의 태도는 그의 정신력의 강도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의 자유에의 의지는 설사 그것이 순수 관념에 해당할지라도 끊임없이 추구될 것이다. 그의 시 「액체계단」은 객관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순전히 강한 의지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직각이 흐르네
직각을 노래하네
직각
직각
직각 한사코 객관적인
도시의 계단들은 경사와 수평, 깊이까지도
하늘 깊숙이 끌고 흐르네
날개가 푸르네
날개가 솟구치네
다음
다음
다음 기필코 상승하는
건축의 날개들은 수직과 나선, 측면까지도
성운 깊숙이 깃을 들이네
설계와 이상. 노고와 탄력. 눈물의 범주. 계단은 피와 뼈와 근면의 조직을 요구하네
-「액체계단」부분
‘액체계단’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어휘이다. 액체는 계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형체가 없는 ‘액체’와 가장 견고한 ‘계단’을 연결 짓는 시인의 상상력은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액체’에 의한 수직 상승의 어려움을 말하는 한편 동시에 ‘계단’에서 암시되듯 수직 상승에의 의지의 견고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는 달리 말하면 인간의 욕망과 주관적 의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발휘되는 초월과 상승의 효과는 미미하고 불가능하다는 점과 관련된다. 액체로 계단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모든 조건과 정황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강인한 정신력은 이마저도 뛰어넘고자 한다. 주관이 객관을 능가하지 못할지라도, 주관적 의지가 주어진 운명을 넘어서지 못할지라도 의지는 포기되지 않는 것이다. 영원한 반복과 순환, 도전과 회귀가 여기에서 펼쳐진다. ‘액체계단’은 불가능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다시 가능을 위한 도전으로 의미화된다. 비논리와 역설로 된 어휘인 ‘액체계단’이야말로 불가능과 가능의 동시적이고 대립적이며 직선적이자 순환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액체계단을 오르는 길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일에 비유될지도 모르겠다. ‘액체’라는 질료에 비하면 ‘도시의 계단’은 얼마나 견고한 것인가. 수직 상승을 위한 계단은 ‘노고와 탄력’을, ‘눈물’을, 그리고 ‘피와 뼈와 근면’을 어쩌면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단단하고 두터울지라도 영원한 회귀와 반복은 마침내 새로운 생성과 창조의 길로 통할지 모를 일이다. 마치 영겁의 시간을 두고 흐르는 물방울이 기어이 바위를 모래알로 부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을 인간의 삶을 이루는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의식이라는 논의틀로 살펴보았던 것은 무엇보다 시인이 보여주듯 그의 운명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초월에의 의지에서 비롯한다. 정숙자 시인은 인간의 조건을 엄정한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들 객관적 사태를 주체적 태도로써 극복하고자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자신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강하고 힘찬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 에너지는 시적 표현에 있어서의 과감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또한 구현되고 있어 주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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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실』2017-가을호 <시집여행>에서
* 김윤정/ 문학평론가, 2007년『시현실』로 등단, 저서『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문학비평과 시대정신』『불확정성의 시학』『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등, 현재 강릉 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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