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정숙자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죽음으로 들여다보는 삶 : 권정우

검지 정숙자 2017. 9. 27. 01:25

 〔평론〕

 『예술가』2010 - 여름(창간)호「시인해부」

 

 

  죽음으로 들여다보는 삶

 

   권정우(시인, 문학평론가)

 

 

  1. 두 번째 인생

  니체는 죽음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죽음을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불멸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당대의 일반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자유롭고 이성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이성적인 죽음이란 비자발적으로 주어지는 자연적 죽음이 아닌 주체가 스스로 선택하는 자발적 죽음이다. 그가 볼 때 자연적 죽음은 병들고 왜곡되고 바보 같은 간수인, 생명력이 퇴화된 육체가 나의 운명을 결정짓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이성적 죽음이 자연적 죽음과 달리 바람직한 죽음이냐 아니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성적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죽음과 관련해서 선택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고가 한순간에 사람을 데려가는 일이 너무도 흔하기 때문이다. 사고로 인한 죽음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며 이성적 죽음은 더욱 아니다. 정숙자 시인은 사고로 인한 죽음을 컴퓨터 자판의 delete 키를 클릭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삶이 순식간에 너무도 쉽게 지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길은 피로 이어진다

  피로써 깊어지고 넓어지고 수려해진다

  폭과 선을 구상한 이의 골똘한 피와 거기 합류한 노동자의 피, 뭉개진 날개

와 파충류들의 피

 

  그리하여 개인적 현실과 집단의 안위를 운반하는 트랙, 혹은 트럭은 나에

게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몰고 왔다

  2010.2.11-12:30 구반포 삼거리 횡단보도

  신호등을 무시한 운전자가 길 건너는 나를 ‘delete' 클릭했다

 

  하, 끝은 그렇게도 올 수 있는 것이었다

 

  머리가 터졌지만

  진눈깨비 흐르는 도로에 선혈이 춤추었지만

  (좌측 좌골 골절)

  (좌측 슬관절 비골불완전 골절)

  (좌측 슬관절 반월상연골판 파열)

  (좌측 대퇴부 타박 및 좌상)

  (두피 열상)

 

  덜 죽었던 나, 덜 살았던 나는 졸도하지도 않고 솟구치는 피와 함께 가해자

를 확인했고 뒹구는 휴대폰을 집어 가족을 연결했다

  어쨌든

  오늘은 입원 30일째

  실밥 뽑은 머리통엔 도드라진 땡감이 하나

  진단서 뒤쪽엔 ‘이제부터의 당신의 삶은 덤입니다’라는 불립문자

 

  혁명가도 전사도 아닌 나…도

  드디어 피를 보탰다 피로 세운 길 앞에 떳떳해졌다

  명실상부 반포본동 주민이 됐다 그러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일어서서! 걸어서- 그 건널목에 돌아가는 날

 

  아스팔트야~ 아스팔트야~

   -「내 피, 맛있었니?」전문

 

 

  시인의 관심사는 길에 있다. 사고를 당하고 나니 길의 참모습이 보인 것이다. 길을 설계한 사람이나 만든 사람들의 땀과 피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 길에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많은 생명들이 길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죽음에까지 이를 수도 있었던 사고가 시인에게 길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심어주었다.

  시를 읽는 나의 관심사는 시인이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에 있다. 사고로 인해서 원하지 않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뻔 했는데도 시인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죽음을 조롱한다.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쳐서 길바닥에 쓰러진 자기를 덜 죽은 것으로, 덜 산 것으로 표현한 것이나, 머리 수술한 자국을 땡감이라 표현한 것을 보고 독자들이 실소를 참지 못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 엄숙해야 한다는 애도의 문법을 시인이 깨뜨렸기 때문이다. 죽음을 조롱하는 시인의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아스팔트에게 내 피가 맛있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는 내용의 마지막 대목이다. 조롱에 의한 웃음이 타인을 향할 때는 건강한 웃음이 되기 어렵다. 웃음의 대상이 지니는 거짓 신화를 벗겨내어 벌거숭이로 만들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웃음이 수반된다. 이 과정에서 조롱거리가 된 것은 그것의 치부가 과장된 채로 드러나게 되므로 사람들은 웃으면서도 마음 한편에 연민과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조롱에 의한 웃음에 유일하게 건강한 웃음이 되는 경우가 있다. 조롱하는 사람이 자기와 관련된 것을 대상으로 삼을 때다. 정숙자 시인은 자기에게 닥칠 뻔한 죽음을 조롱함으로써 죽음 앞에서 엄숙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뜨리면서도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각종 검사와 치료 동반한 베드

  그간의 삶이야 전생으로 여기려 한다

  어제는 뇌 촬영했다

  ‘깨끗하다’는 판독이지만

  필름이 잡아내지 못한 편편 기억상실을

  옆 환자들과 가족이 근심-근심한다

  나도 그게 무서워

  휠체어 타고 화장실 가서 혼자 울었다

  그렇지만 내 두 번째 삶은

  첫 번째 인생보다 화려하리라

 

  첫 번째 인생이 남긴 유산과

  그날, 한 방에 날아가지 않은 이유와

  맑은 눈 요정이 도울 테니까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 차원의 멈춤은 금물

  내 안의 아프라삭스*가 어둠을 다해

  빨강과 초록을 다해

  껍질 깨는 소리 들리는 한밤

  아직 덜 마른 무릎과 새하얀 발가락들

  다시 한 번 날개가 되어지리라

  겨울 난 나도풍란에 훨훨 꽃이 피리라

     - 「두 번째 인생」전문 // * 헤르만 헤세『데미안』참조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쌍둥이 형제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도덕을 실천하고 자기 극복을 통해서 자기를 부단히 창조해나가는 위버멘쉬적 삶을 사는 사람만이 이성적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꼭 이성적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현명하게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에 대해서도 현명하게 대처할 것이다.

  「내 피, 맛있었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에서는 죽을 뻔한 뒤에,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더 주체적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두 번의 삶과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행운의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고자 한다. 시인은, 시인이 소망하는 것은 첫 번째 인생보다 화려한 두 번째 인생이다.

  현명한 삶에 뒤따르는 것이 현명한 죽음이듯이, 첫 번째 인생을 현명하게 마무리하지 않는다면 화려한 두 번째 인생은 없다. 시인은 사고로 인해서 기억이 상실되었을 수도 있다. 기억상실은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한다.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 가운데 기억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경험한 것 가운데 의미 있는 것들이 대부분 압축파일의 형태로 내 머리 속에 기억된다. 기억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끈과 같다. 끈 하나가 끊어지면 끈에 달려있던 중요한 과거를 송두리째 잃게 된다.

  기억의 모든 끈이 끊어진다 해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만이 화려한 두 번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시인은 하는 것 같다. 첫 번째 삶을 전생으로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첫 번째 삶과는 다른 두 번째 삶을 살 수 있다. 첫 번째 인생이 유산으로 남은 거지만 유산이라 생각하지 않기,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운에 의지하며 살지 않기, 살아남아서 좋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기가 쉬운 일인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하면 삶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지기 쉽다.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던 사람이라면 같은 경험이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시인의 경우처럼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될 수도 있다. 첫 번째 인생에 미련을 두지 않아야 화려한 두 번째 인생이 펼쳐질 수 있다. 죽을 뻔한 경험을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정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기를 버리는 방법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지 않은가. 정숙자 시인은 머리로만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넘어선다. 죽을 뻔한 경험을 그리고 있는 그의 시는 몸으로 쓴 것이어서 살갑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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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2010-여름(창간)호 <시인해부>에서

 * 권정우/ 1964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93년『문학사상』평론으로 등단. 2005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시 등단. 저서 『우리시를 읽는 즐거움』, 『정지용 시집을 읽는다』, 『한국 현대시의 분석적 이해』등.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 블로그주: 인용 시「두 번째 인생」은,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 수록되지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