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한 방울로 태어난다
정숙자
한 방울의 물은 물의 씨앗이다
떨어지는 순간 껍질을 깨고 다른 물방울의 손을 잡는다
떠나는 발자국 소리가 난다
눈 뜰 겨를도 없이 숨진 물방울에게, 더는 크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물방울에게 까닭을 물어서는 안 된다
심어진 처음 자리가 이미 많은 얘기다
자라는 건 꿈이 아니다
걷고, 달리고 소용돌이쳐야만 한다
걷고, 달리고 소용돌이칠 행운을 입어야 한다
도랑을 지나 시내를 지나 청푸른 강물일 때도 오체투지
~ 오체투지~ 숱한 바람을 재워야 한다
그러나 보아라
눈… 비… 이슬…
어느 시간을 돌아온 물도 마지막 길에는 눈이 부시다
한 생애를 충실히 마친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들이 깃털
을 가다듬는다
바다는 물들의 공동묘지다
여기 이 별에 태어남보다 더한 추락은 없었노라고, 그래
서 삶이 조금은 즐거울 수 있었노라고
바다가 날아오른다 파도가 한껏 날개를 편다
먼저 돌아간 물방울들이, 또 태어날 물방울들이 하늘 가
득 햇볕을 쬔다
-『현대시』2003.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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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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