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25
정숙자
비둘기 속이기// 아무래도 비둘기는 나를 철이나 돌쯤으로 여기는가보다.
이런 정도의 믿음을 당하는 쪽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을 빚지게 마련이
다. 신의란 내 손가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서이니 일정 부분 갚아야 할 당위
가 돋친 게 분명하다.
아무리 정신을 차린다 해도 가끔 모이를 잊고 산책길에 들어서는 날이 있다.
장황스레 날갯소리를 내며 모여들고, 뒤뚱뒤뚱 따라오는 비둘기들에게 “깜빡
잊고 못 챙겨왔다. 내일은 꼭 갖다 주마.” 고백해 봤자 비둘기들은 들은 둥 만
둥 계속 따라온다.
비둘기들의 기대감을 무너뜨린 나로서는 여간 딱하고 민망한 노릇이 아니다.
새대가리보다 못한 내 뒤통수를 탓해본들 별무소용! 비둘기들이 여느 주민들
이 지나갈 때는 반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나를 알아보는지 그것이 또한 궁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 또 잊었다. 한참이나 걸었으니 되돌아가 모이를 가져올 수도 없
고 어쩐다? 옳지, 비둘기를 속이는 수밖에. 나뭇잎이 아치를 이룬 산책로를 놔
두고 매연과 먼지가 풀풀대는 왕복 6차선 도로변의 인도로 걷기로 한다. 그들
에게 안 들켜야지.
비둘기들이 유독 나를 알아보는 근거가 책 읽는 데 연유한다면, 그렇다면 딴
길로 에둘러 걷는다 해도 높은 데서 바라보다가 쫓아 내려올 수가 있지 않을까.
그래, 일단 책을 접어야 돼. 아냐. 그래도 내 손을 볼 수가 있어. 뒷짐을 지고
책을 숨겨야겠어.
결국 나는 금 쪼가리 시간과 책을 덮고 비둘기 눈을 피해 (평소 가로지르던)
공터를 에둘러 걷는다. 두 마리가 갸웃갸웃 나를 쳐다봤으나 눈치 채지 못한
눈치다. 콕 콕 바닥을 찍으며 한가롭다. 후유, 안심 지점에 이르러 뒷짐을 풀고
다시 책을 연다.
비둘기는 오늘 내가 산책을 안 나온 줄 알 것이다. 면전에서 실망을 안겨주
느니보다는 그편이 낫다. 이 협소한 꾀나마 여러 번의 미안함 끝에 겨우 고안
해 낸 것이니 모처럼의 사면이다. 낼부터는 모이 깍쟁이*를 아예 신발 속에 넣
어 둘까 뒤적거린다.
-전문-
* 깍쟁이: 전북 김제 지방에서 간장종지를 일컫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플라스틱 재질의 뚜껑이 있는 일회용 용기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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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세계』2017-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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