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발묵(潑墨)/ 김희숙

검지 정숙자 2017. 9. 19. 15:28

 

 

    발묵潑墨

 

   김희숙

 

 

  밀밭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휩쓸린다

  흩뿌려진 씨앗들은

  휩쓸리는 풍경이 된다

  한 번씩 밀려왔다 밀려갈 때마다

  푸른색을 버리고 누르스름한 색을 묻혀오는

  바람 타고 노는 것이다

  밀 밭 위쪽으로 붉게 노을이 밀려와있다

  붉은 발묵潑墨으로 번져있다

 

  밀밭 위 하늘은 간지러운 것이다

  누렇게 익은 껍질 속에는 터질 듯

  흥분이 숨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껍질 속에는 젓가락 반기는 국수가 들어있고

  노릇노릇 빵이 들어있다

 

  검은 먹 갈다 잠든 어릴 적 같다

  고조부는 하늘에 살짝 먹을 스쳤을 뿐인데

  얼룩진 노을 저편

  둥그런 하늘의 귀퉁이마다 번져 나오는 발묵潑墨

 

  밀밭 끝이 까끌까끌하다 

  끼니는 다 저렇게 까끌까끌한 것들에서 나온다

  가끔 입 안이 까끌까끌한 것도

  까끌까끌한 세상에서 지친 바람 탓이다

 

  여름, 몇 번의 발묵潑墨이 번져 갔으나

  변변한 묵화 한 점 건지질 못했다

  판 걷어치우고 나면

  뭉쳐서 집어 던진 화선지 몇 뭉치

  여전히 하늘에 뭉게뭉게 떠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에서 "밀밭"과 "노을"은 즉각적인 결합이 아니라 더딘 속도의 번짐을 통해 만나고 있다. 밀밭과 노을을 결합시키는 것은 더딘 시간이다. 밀밭의 의미소들이 바람을 타고 서서히 노을의 의미소로 번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의미의 씨앗들이 쏟아진다. (……)  밀밭이 천천히 노을 쪽으로 이동할 때, 노을의 한 존재인 "고조부"가 등장하고 고조부와 연결된 생계의 긴 역사가 들어온다. 밀밭이 "국수"가 가리키는 가난한 생계를 상징한다면, 밀밭과 노을이 연결되면서 이 생계는 "까끌까끌한" 한 가계의 역사로 확장되는 것이다. 밀밭의 "푸른색"이 서서히 번져 노을의 "누르스름한 색"과 겹쳐질 때, 현재는 과거를 소환하고 소환된 과거는 다시 현재와 연결되면서 역사의 긴 끈을 이룬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

  * 시집『곡물의 지도』에서 / 2017. 7. 30. <도서출판 달샘>펴냄

  * 김희숙/ 전남 광주 출생, 2011년『시와표현』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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