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검지 정숙자 2017. 9. 14. 21:21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박준이 선택한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서정(Lyric)'이다. 이 오래되고도 아득한 단어, '서정'의 뒤편에는 악기가 있다. 서정의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를 동반하는 악기는 현악기 리라(Lyric)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현을 종종 짐승의 내장으로 만들었다. 양의 내장을 잘 씻어서 산(酸)에 담갔다가 재로 씻어서는 길쭉하게 잘랐다. 그것을 말렸다가 유황에 넣어 표백했다고 한다. 산과 재와 유황이라는 극악한 지옥과, 시간이라는 무표정한 얼굴을 통과한 짐승의 내장을 쓰다듬을 때 나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그것을 우리가 '서정'이라는 오래된 단어의 영혼으로  가정할 수 있을 때 박준이 쓰는 시들로 들어가는 입구는 조금씩 넓어진다. (허수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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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에서/ 1판1쇄 2012.12.5./ 1판31쇄 2017.6.30.<(주)문학동네>펴냄

  * 박준/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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