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어이, 비정규/ 한선자

검지 정숙자 2017. 9. 13. 14:37

 

 

    어이, 비정규

 

    한선자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그를

  사람들은 비정규라 부른다

  기계 부품을 만드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풀어지지만

  살뜰한 가족이 그를 다시 조여준다

  어쩌다 바라보는 하늘은 너무 높고

  그의 신음은 바닥을 기어다닌다

  그가 받는 지시는 장문이고

  그를 퇴출하는 문자는 단문이지만

  그는 길고 짙은 그림자로 버틴다

  노동의 대가가 너무 헐렁하다 싶으면

  포장마차에 들러 몸의 전원을 꺼버린다

  전원을 꺼도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어이, 비정규, 어이, 비정규,

  그를 부르는 환청이 족쇄처럼 따라다닌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한국에서 '비정규'라는 직업의 조건에 붙이는 명명命名처럼 아프고 시린 말이 또 있을까. 화자의 직업적 환경과 대비될지도 모르는 이 직업상의 근무형태는 무수한 절망과 죽음을 초래했고, 그러기에 화자는 그런 무수한 익명의 비정규직 사람들을 아예 뭉뚱그려 "어이, 비정규" 하고 부르기에 이른다. 이런 아픈 호명呼名은 비정규직에 대한 애정과 연민에서 발원하는 것이면서 한국노동시장의 구조에서 박탈당하고 박해받는 순수하고 정직한 직업노동에 대한 분노로 얼비친다. 그런 노동자들은 "받는 지시는 장문"이지만 "그를 퇴출하는 문자는 단문"이라는 간명하지만 뼈아픈 지적에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다. 소위 노동시장의 유연성 운운하는 사용자들의 일반적이고 편의적인 발상이 양산해낸 무수한 비정규직이 익명(anonymity)을 벗고 노동현장의 온당한 유명有名으로 존재하길 간원하는 시편이다. 그때까지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풀어지지만/ 살뜰한 가족이 다시 그를 조여" 주는 따스한 뒷배를 거느린다. 가족은 비정규직을 넘어서는 혈연의 영원직永遠職이지 싶다./ 이렇듯 존재의 조건에 대한 한선자 시인의 시선과 관심은, 대략 두 가지 층위層位에서 시적 정서를 유지한다. 하나는 심정적 위로와 사랑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내면內面의 파고波高와 그 음양陰陽을 그린다. 또 하나는 삶이라는 실존적 환경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풍정風情들에 대한 화자의 감성과 인성(humanity)을 통한 사회적 정서情緖를 드러내는 반응이다. (유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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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불발된 연애들』에서/ 2017. 9. 6. <시산맥사> 펴냄

  * 한선자/ 전북 장수 출생, 2003년 『내 작은 섬까지 그가 왔다』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울어라 실컷 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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