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한선자
나무 그늘에 오십 년 된 차를 세우고 흘러간 노래를
들었다
초록벌레 한 마리 선바이저에 앉아 함께 듣고 있었다
살짝 걷어 내려 했으나 벌레는 열린 창문 안쪽으로 떨
어졌다
의자 밑에서 차 안의 화장지통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벌레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음습한 그늘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햇빛에 올라타는 연습을 하던 나는 자주 미끄러져
거미줄 같은 홑껍데기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날이
많았다
눈물이 반죽한 질척한 시간들이
나를 다시 더 짙은 그늘로 끌고 다녔다
캄캄한 골방에서 내 그림자와 술을 마셨고
물미역처럼 풀어져 바닷가 검은 모래 속에 불륜은 낳
기도 했지만
까만 씨앗을 넣고 돌리면 하얀 꽃송이가 나오는
얼룩이 묻어 있는 그늘을 넣으면 바싹 마른 햇살이
나오는
제법 그럴싸한 세탁기, 그런 세탁기를 한 대 샀다
그때쯤에는 초록벌레 따위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
봄날이 기울던 무렵 엑셀을 밟는 발바닥이 가려웠다
질주하던 욕망에 브리이크가 걸렸다
나뭇잎같이 가볍던 심장을 벌레가 갉아 먹는지
가슴에서 기타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어디에도 없던 초록벌레가
날개를 가진 문장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믿기 시
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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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불발된 연애들』에서/ 2017. 9. 6. <시산맥사> 펴냄
* 한선자/ 전북 장수 출생, 2003년 시집『내 작은 섬까지 그가 왔다』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울어라 실컷 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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