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환삼덩굴/ 김기준

검지 정숙자 2017. 9. 2. 14:15

 

 

    환삼덩굴

 

    김기준

 

 

  어릴 적

  꼴 베러 가면

  종종

  가시 달린 덩굴에 스쳐

  팔과 다리에 채찍을 맞은 듯

  무척이나 아픈

  핏빛 줄이 생기곤 했네

 

  그 어린 마음은

  낫을 휘둘러

  이름도 모르는

  그 덩굴을 갈기갈기 사정없이 찢어 놓았네

 

  세월이 한참 지난

  반백의 나이

  서울의 봄날

  정류장 근처 보도블록 귀퉁이에서

  어릴 적 함께하던

  그 풀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네

 

  옛 추억이 생각나

  오고가며 물도 주고 만져 보았네

  부드러운 솜털마냥

  까끌까끌 잎과 덩굴

  이 아이가 그 아이인가

  그 이름이 환삼덩굴임을 난생처음 알았네

 

  여름 가고

  가을이 올 무렵

 

  정강이를 스치는

  아! 따가워 신음소리

  나를 향해 팔을 내밀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고개 숙여

  만져주고 안아주었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했어

 

  어릴 적 그 낫질이

  이토록 가슴 속에

  묻혀 있을 줄이야

  나도 몰랐네

 

  반백이 넘고 나서야

  이제야 사람다워지는 것 같네

 

  나의 무심한 분노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었을까

 

  세상 모든 것에

  미안하고 죄송할 따름이네

     -전문-

 

 

  해설> 한 문장: 20세기 독일 시인 중 최고의 실존주의 시인으로 꼽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감정만이 아니고 경험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시가 감정이라면 이미 젊었을 때 넘쳐났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은 시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 라캉 Jacques Lacan은 그의 저서 『에크리Ecrits』에서 언어와 실재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深淵'이 있다고 하면서 언어(기표)와 실재(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 김기준 시인의 언어는 현대시로서 부족한 면이 있지만 그 언어의 내면에 잠재된 맑은 심성과 생명의 실상을 투사하는 시정신이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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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착하고 아름다운』에서/ 2017.8. 20. <문화발전소> 펴냄

  * 김기준金祺俊/ 1963년 경남 김해 출생, 월간『시see』제7회 추천시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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