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하다
박선희
달리고 싶을 때마다 그가 믿는 건
손이다
손이 발이었던 기억으로 건반 위를 달린다
한 보폭이 날아오를 수 있는 거라는
여든여덟 개의 희고 검은 계단이다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일은 하늘 너머로 그네를 뛰는 일이지만
달릴 때마다 관절 툭툭 불거진 마디로 악수를 청한다
수직으로 튕겨 오를 때면 파열음으로 미끄러지기 일쑤
빗살무늬로 달려 네 발로 기고 싶지만
직립인간이 되었으므로
건반 위의 손 금세 각을 세운다
연어 떼처럼 밀려오는 소리의 물살을 읽으며
삐걱이는 나무계단을 내려오는 저녁
창 밖 계단들은 여전히 가파르다
벼랑 위의 발,
손을 세워 달린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건반"이 "여든여덟 개의 희고 검은 계단"이 되는 순간에 손과 발은 동일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손끝으로 오르내리는 "건반"이야말로 (희고 검은) "계단"이 된다는 상상력에 시인은 유감없이 가닿는다. "건반"위의 "손"이 과거 직립인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손이 발이 된" 기억 내부에서 "계단"을 내달린다는 것은 이 경쾌한 건반의 리듬으로 인해 계단 위의 가파른 위태로움이 발생한다. "네 발로 기고 싶지만/ 직립인간이 되었으므로" 각을 세운 "건반 위의 손"은 여전히 건반 위를 종횡무진 손끝 '각'을 세워 내달리고 있다. 손끝의 각은 결국 "벼랑 위의 발"로 화化한다. 건반 위 손의 경쾌함이 발의 위태로움을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전해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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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건반 위의 여자』에서/ 2016. 8. 10. <현대시학사> 펴냄
* 박선희/ 전북 김제 출생, 2014년『월간문학』으로 등단, 2016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가장애문화예술가) 창작활동 지원금 수혜, 수필집 『아름다운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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