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돼지
김혜순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한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 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있다! 뱀처럼 살아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전문-
해설> 한 문장: 유물론의 돼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지 않는다. 구덩이에 살처분된 돼지가 부활하는 방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덤에서 가스가 터져서 창자가 솟고 침출수가 흘러나오는 것, 이것이 부활이다. "피어라 돼지"는 돼지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돼지는 '꽃'이다)이기도 하지만, 돼지의 희생에 대한 위로이자 진혼(돼지는 '피'다)이기도 하다. 돼지여, 꽃으로 피어나라. 돼지여, 너는 온통 피투성이와 피비린내로구나. 무덤에 들어간 돼지가 세상에 제 몸을 다시 드러냈다는 것이야말로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돼지복음 2장, 부활의 서사다. (……) "없이"라는 술어로 정렬되었다고 해서 이 장면의 잔혹함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저 구타, 피부 벗김, 결박, 물고문, 살해 위협에는 '자백을 받아냄'이라는 목적이 있다. 원하는 말을 제공한다면 혹은 그 정보를 내가 모른다는 게 분명해진다면, 저들이 고문을 중단할지도 모른다. 실낱같은 희망이다. 그런데 고문, 구타, 위협에 다른 목적이 없다면? 가장 잔혹한 살해가 저 감금의 끝에서 기다린다면? 이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에 따라서 구원의 서사는 가파르게 전개되어간다. "참으로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으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신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이사야서」53장 4절) 그러나 시인이 전하는 새로운 복음서에서 우리는 '그'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成肉身) 한 이가 아니라, 우리라는 다수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라는 개별자가 됨으로써 성육신한 돼지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전하는 가장 깊은 전언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권혁웅/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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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피어라 돼지』에서/ 제1판 1쇄 2016. 3. 3. | 제1판 3쇄 2017. 5. 2. <(주)문학과지성사> 펴냄
* 김혜순/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또 다른 별에서』『슬픔치약 거울크림』등,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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