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간접화법'과
텍스트의 주기율표
장철환
내 생각에 소설가란 세계의 사물 위에 자기 의견을 발할 권리가 없다.
그는 창작에 있어 창조하지만 침묵하는 신을 본받아야 한다.
-플로베르, 「Amelie Bosquet에게 보낸 편지」(1866.8.20.)
1. 창조하지만 침묵하는 신
"세계의 사물 위에 자기 의견을 말할 권리"가 없는 자에게 세계의 사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세계의 사물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에 "자기 의견"을 덧붙일 수 없다면, 소설의 창작은 한갓 '기록물documentary'에 불과한 것인가? 플로베르의 선언은 작가와 세계, 그리고 그가 창조한 세계가 낭만주의의 '자와와 세계의 동일성'으로부터 급진적으로 이탈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제 작가는 자신이 기록하고 창조한 세계에 대해 자기의 의견을 개진할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가? "창조하지만 침묵하는 신"은 소설가돠 그가 기록하고 창조한 세계 사이의 변화를 매우 미묘하게 포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으나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理神論의 신관처럼 이제 작가는 작품 속에 편재하면서 침묵하는 신과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이른바 '저자'의 죽음은 풀로베르에게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창작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서술 방법narration에 획기적인 변화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화법은 그것이 서술하는 대상에 대한 서술자의 관점과 태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화법의 변화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소설에서 서술자가 등장인물의 말이나 생각을 인용하는 방식의 차이는, 그 인물에 대한 서술자의 관점과 태도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창조하지만 침묵하는 신"이 되기 위해 서술자는 어떤 화법을 취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인물들이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간접화법이다. 왜냐하면 간접화법에는 서술자의 관점과 태도를 나타내는 다양한 지표들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접화법에서 서술자의 관점과 태도를 배제하는 것이 "세계의 사물 위에 자기 의견"을 배제하는 일차적 방법이 된다.
플로베르의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이 지닌 의의는 여기에 있다. 자유간접화법은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점이지대에 위치한다. 그것은 인물의 생각과 말을 따옴표 없이 인용한다는 점에서 간접화법의 특징을 지니는 한편, 서술자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주절을 생략하고 종속절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직접화법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다. 이때 서술자의 위치가 직접적으로 노출되지는 않지만, 그것의 존재를 암시하는 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인칭과 시제가 그러한데, 이것들은 서술자의 위치가 드러나는 화법의 간극과 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간접화법은 등장인물의 목소리와 서술자의 목소리가 혼종되어 있는 매우 특이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플로베르의 자유간접화법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바흐찐(김종로,[『마담 보봐리』에 나타난 자유간접화법의 의미 분석]「강원대인문논총」15집,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06.6.)이다. 바흐찐은 하나의 발화에는 하나의 단일한 주제가 존재한다는 구조주의적 사고를 부정한다. 만약 우리가 발화를 할 때 발화하는 자와는 다른 제3의 주체들이 개입하고 있다면, 이것은 단일한 발화의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즉 발화에는 타자의 목소리가 개입하고, 그 결과 발화는 '다성성polyphony'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성성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는 대부분의 발화가 자유간접화법과 같은 '혼성 구문'(바흐찐의 '혼성 구문'은 '양식화' '패러디' '은폐된 논쟁' '변형' 등을 통해 형성된 문장을 말한다. 김종로 「자유간접화법의 다음성적 분석」『불어불문학 연구』36집, 한국불어불문학회, 1998.)으로 구성됨을 의미한다.이것이 지닌 의의는 매우 크다. 우리의 발화가 다성적일 수밖에 없다면, 기존의 서정시가 가정해 왔던 '자아와 세계의 유기적 통일성'은 설 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우리의 발화가 타인의 목소리들로 구성될 때, 작품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단일한 자아의 목소리를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채상우의 시편들에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는 다양한 '텍스트'들을 인용하면서 다성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기존의 서정시가 견고하게 유지해 왔던 전제들을 해체함으로써, 그는 혼종성의 시학을 향해 일보 전진하고 있다. 여기서 원原 텍스트의 출처와 기원을 따지는 일은 대체로 부질없다. 타인의 목소리가 시 텍스트 안으로 삽입될 때, 원 텍스트를 형성하고 있던 의미망은 변형되고 굴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목할 것은 타인의 목소리가 시 텍스트 안으로 인용될 때 나타나는 변용의 메커니즘이다. 자유간접화법은 그러한 메커니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제 우리는 채상우의 시에 나타난 자유간접화법의 양상과 의미를 주로 『리튬』을 통해 추적해 볼 것이다. '리튬'이 매우 가벼운 원소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든 재충전이 가능할 만큼의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2. '당신'은 누구시길래?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목소리들이 있는가? 여기 하나의 원소元素가 있다. 단일한 원자原子로 구성된, 그래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다고 가정된 물질 구성의 최소 단자들, 가장 가벼운 수소(H)와 헬륨(He)을 비롯해, 가장 안정적이라는 철(Fe), 그리고 프랑스 퀴리 부부가 발견한 라듐(Ra)에 이르기까지, 멘델레예프가 처음 제안하고 모즐리가 변형한 주기율표에는 총 118개의 원소가 있다. 그리고 리튬(Li)이 있다. 원자 번호 3번, 원소 가운데 가장 가벼운 금속, 그러나 원자량 6.941에 불과한 이 리튬에는 얼마나 많은 미립자들이 있는가? 4개의 게이지 입자와 6개의 랩톤, 3개의 뉴트리노, 그리고 수백 개의 하드론들. 그 하드론들을 구성하는 6종류의 쿼크와 반쿼크들.
그러니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목소리들이 있겠는가? 원소에서 목소리로의 유비가 비약이 아님을 입증할 방법을 찾는다면, 채상우의 『리튬』을 볼 일이다. 노래, 영화, 시, 소설, 성경, 그림 심지어는 주술呪術에 이르기까지 다성적 목소리의 음폭이 얼마나 넓은지는 시집 마지막에 실린 '텍스트'란 이름의 목록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보라, 「시인의 말」을 제외한 총 57편의 시에 매달린 '텍스트'가 얼마나 많은지를. 자그마치 150개의 텍스트가 주기율표의 원소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출처를 명기한 것만 그렇다. 출처를 명기하지 않은 또다른 텍스트가 없다고 가정할 수 없다면, 텍스트의 총목록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러니 텍스트의 세목을 나열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핵심은 목록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매커니즘에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주기period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시집 『리튬』을 대하는 '텍스트의 화학자'가 도모해야 할 바다.
『리튬』에 인용된 텍스트의 주기율표는 몇 가지 주요 족族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음악족, 영화족, 문학족, 기타족,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족이다. 특히 노래는 음악족의 대표 원소이다. 이는 시와 노래가 발생학적인 차원에서 친연성을 지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양자 모두 언어라는 공통의 매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시인이 노래를 차용할 때 소리와 의미의 결, 즉 리듬과 내용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방문외판원은 오지 않았다. 칠 년 전부터 십이 년 전부터 아니 이십오 년 전부터 그동안 부랑자들과 소매치기들이 사라졌다 돌아왔고 그 많던 간첩들은 내가 사랑했던 몇몇 애인들과 종적을 감췄다 지금은 방문외판원에 대한 소문마저 끊긴 지 오래 한때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엔 사람이 사람 사이에 숨어 있었고 깃발이 나부꼈고 노래가 있었다 방문외판원은 그 자신 인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 당신은 누구시길래 지구레코드 가게에서 헤이 쥬드를 처음 들었던 날 그 전날에도 그랬듯 국기를 향해 부동자세를 취했다 (중략) 그러나 왜 하필 우리인가 가족들은 방문외판원이 대문을 나서자마자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남긴 약속은 정확히 그날 그 시간에 지켜졌다 하늘 첫 마을부터 땅끝 마을까지 무너진 집터에서 저 공장 뜰까지 모두 들떴고 모두 기뻐했고 모두 안심했다 서로를 축복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까
방문외판원은 두 번 방문하지 않는다
-「혁명전야」부분
이 시에서 노래가 개입하는 양상은 다채롭다. 마치 '혁명 전의 밤'처럼 웅성거리는 소리들로 들끓고 있다. 우선 "지구레코드 가게에서 헤이 쥬드를 처음 들었던 날"에서 보듯, 비틀즈의 노래 「Hey Jude」가 들린다. 만약 비틀즈의 노래를 아는 자라면 노래의 음과 가사를 흥얼거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를 읽는 독자가 선택할 문제. 다시 말해 「Hey Jude」의 가사와 곡을 아는 것이 이 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Hey Jude」가 하나의 소재로써 삽입된 것이지 텍스트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은 그 양상이 다르다. 화자가 진술하는 텍스트의 내용이 송창식의 「사랑이야」의 가사의 일절에서 직접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송창식의 노래에 친숙한 자라면 금방 해당 가사의 멜로디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아무런 인용 부호 없이 텍스트 속에 삽입되었다. 외적 표지만으로는 노래의 일부분인지 아니면 시인의 목소리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자유간접화법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따옴표가 없다는 것은 해당 구절이 시의 맥락 속에 용해되었음을, 즉 시의 내용과 친연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당신은 누구시길래"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당신"은 "방문외판원"을 직접적으로 호출하지만 그의 실체는 분명치 않다. 그는 왜 우리를 방문한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팔고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자기가 "남긴 약속"을 정확히 지킨 자라는 점이다. 방문 날짜를 지킨 것이 아님에 유의하자. 다시 말해 그의 약속은 방문 후에 이루어질 어떤 사태 혹은 사건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하늘 첫 마을부터 땅끝 마을까지 무너진 집터에서 저 공장 뜰까지"가 '노래마을'의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노래의 제목과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인용된 구절의 장소가 모두 제목 속 '이 그늘진 땅'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인용자가 노래의 일부를 차용한 의도와 목적을 암시한다. 즉 "방문외판원"은 자신의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이 그늘진 땅'에 축복을 내린 자를 상징하기 위해 도입된 '당신'이다. 그리고 그는 두 번 방문하지 않음으로써 '이 그늘진 땅'에의 축복이 일회적 사건임을 예증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는 다만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일 뿐……. 여기에는 다시 오지 않는 "방문외판원"에 대한 시적 주체의 회한과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시적 주체가 송창식의 목소리를 빌려 "당신은 누구시길래"라고 묻는 것이 한층 절묘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사라진 당신'이 시적 주체가 줄기차게 묻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당신은 아무 때나 불쑥불쑥 들러붙곤 하지 두 눈을 면도칼로 도려내기도 하고 뺨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성기를 툭툭 건드리며 꺄르륵 웃기도 하고 발바닥에 쇠못을 박기도 하지 숭숭 구멍 난 발바닥 아래 개미 떼처럼 기어 나와 온 방 안을 점령하는 당신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 당신 등 뒤에 서면 난 곧바로 침을 뱉는데 난 지난 세기의 마지막 창녀 마지막 창녀 당신은 당신을 팔아버린 자와 대면하고 있지 당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지 (중략) 매번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속삭이는 당신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모욕을 참아야 하나 도무지 거부할 길 없는 당신 당신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내가 잠시라도 매달리면 당신은 칼날 같은 욕설을 내뱉지 당신은 지나치게 나와 닮았어 당신과 나는 아주아주 오래전에 죽었는 걸 장지뱀 껍질에 기생하는 푸른 주름무당버섯처럼 그러니 우리 토닥토닥 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위로하고 껴안고 악수하고 그만하자 손 흔들고 헤어지면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당신 그리고 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남김없이 잊으라 했던 말도 남김없이 저녁하늘의 물잠자리처럼 꼿*도 업는 깁흔나무처럼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분
* 블로그주: 고어 'ㅺㅗㅅ' 이 획은 조합 불가.
이 시에는 매우 많은 노래가 겹쳐져 있다. 무엇보다도 제목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Susanne Bier의 「Things we lost in the fire」에서 온 것이다. 본문의 경우,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는 나훈아의 「영영」에서,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 당신 등 뒤에 서면"은 김수희의 「애모」에서, "당신은 당신을 팔아 버린 자와 대면하고 있지"는 David bowie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에서, "당신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는 패티 김의 「그대 없이는 못 살아」에서,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당신 그리고 나"는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는 민중가요「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한편의 시에 7곡의 노래가 직접 또는 깐쩌ㅃ쩎으로 인용되는 경우는 그 유례를 찾기조차 힘들다. 시집 『리튬』전체에서 가장 많은 노래가 인용되고 있는 경우이다.(시집 전체에서 가장 많은 인용을 보이는 시는 「저개발의 기억」과 「沒書」이다. 이들은 총 10개의 텍스트를 품고 있는데, 여기서 노래는 5개와 3개일 뿐이다. 따라서 시집 전체에서 가장 많은 노래를 인용하고 있는 시는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된다. 참고로 시「Still Life」는 전부 여섯 곡의 노래를 인용하고 있고,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김정미,「간다고 하지 마오」; 사랑의 하모니,「별이여 사랑이여」; 산울림, 「청춘」; 윤연선,「얼굴」한대수,「하루아침」; God God Dolls,「Iris」) 만약 여기에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와 Leos Sarax 감독의 영화「Mauvais sang (나쁜 피)」까지 합친다면 모두 9개의 텍스트가 인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시「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 목소리들의 울림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노래의 가사가 그대로 인용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는 전자를,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 당신 등 뒤에 서면", "당신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그리고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당신 그리고 나"는 후자를 대표한다. 후자의 경우 인용되는 과정에서 특정의 변화가 보이는데, 그것은 텍스트의 내용과 인용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원곡의 가사는 이렇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 그대 등 뒤에 서면",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그리고 "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그대 그리고 나". 인용자는 원곡의 "그대"를 모두 "당신"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당신"이 '자유간접화법'에서 인용자의 시선이 드러나는 틈이자 구멍임을 보여 준다. 그 구멍을 통해 시적 주체의 관점과 태도가 조금씩 누출되고 있다. 그러면 "그대"에게는 있으나 "당신"에게는 없는 것, 혹은 "그대"가 지니는 연인 사이의 친근함을 "당신"은 적극적으로 휘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시적 주체에 의해 텍스트 내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시에서 아니 시집 전체에서 '당신'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존재방식이 매우 특이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시 아니 시집 전체에 두루 존재하지만,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한용운의 '침묵하는 님'처럼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시는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직접 호출하고 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은 스스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편재해 있는 존재이다. 이제 묻자, '당신'은 누구며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에 편재하는 '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당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동잎, 푸른 하늘, 향기, 신내, 저녁놀, 그리고 나의 가슴(「한용운「알 수 없어요」『님의 침묵』, 안동서관, 1925.) 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에서 한용운의「알 수 없어요」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당신'의 존재 방식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알 수 없어요」라는 텍스트가 시 속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물음이다. 그렇다, 텍스트「알 수 없어요」또한 시 속에 두루 편재해 있으나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유령처럼 시인이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로서.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용된 텍스트에서 흘러나오는 다성적 목소리들은 "불난 마음 불탄 마음"(「盡心」) 속에서 시적 주체가 잃어버린 것들이며, 그것은 최종적으로 '당신의 목소리'로 수렴된다고. 그러므로 부재로서 편재한 '당신'에 대해 "알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리튬』속에 '당신'이 현상하는 방식, 즉 '오동잎, 푸른 하늘, 향기, 시내, 저녁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가슴'이라는 우회로를 통과할 필요가 생겼다. '당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세계 속에서 '당신'이 출현하는 방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우선, 주체에게 '당신'은 "잊으라 했는데잊어 달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때나 불쑥불쑥 들러붙"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잠시라도 매달리면 당신은 칼날 같은 욕설을 내뱉지"에서 보듯, '당신'은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이것은 '당신'돠 '나'의 관계가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임을 의미한다. 특별히 "그대 내게 다가와 속삭이네 자책과 욕설을"(「그리하여 나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양자가 명령과 복종의 위계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별한 애인에 대해 복수하는 연인처럼 애증의 대상으로서 '당신', 이것이 '나'에게 있어 '당신'의 일차적 의미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절대적인 타자인 것은 아니다. "당신은 지나치게 나와 닮았어"와 "당신과 나는 하나인가요"(「감정교육」) 에서 보듯, '당신'은 또 '나'이기도 한 것이다. '당신'이란 한자의 원래 의미가 '그 자신'이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의 또 다른 의미, 즉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이상,「날개」권영민 편, 『이상 전집 2』, 뿔, 2009.) 가 예증한 '분열된 자아'라는 두 번째 '당신'에 이른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당신을 팔아 버린 자와 대면하고 있지"에 주목하자. 이 구절은 노래 「The man who sold the world」", 즉 "당신은 세상을 팔아 버린 자와 대면하고 있지"라는 점이다. 인용자가 자의적으로 원곡의 "세상(the world)"을 "당신"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당신"이 "세상"으로 읽힐 수 있음을 반증한다. "세상"으로서의 '당신'을 "세상"으로 치환하여 읽는다면, "난 지난 세기의 마지막 창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적 주체는 몸을 파는 행위를 통해서 "지난 세기"의 '당신'과 강력하게 결속되었던 자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血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꽃잎, 꽃잎, 꽃잎들 아직 있다 거기에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가지 않았다 오로지 가지 않았다 가지 않고 있다 가지 않는다"가 예증하는 것은 지나간 시간 속 '당신'에의 고착이다. 이것은 시적 주체가 "꽃잎"이 있던 "지난 세기"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3. 조락한 주체가 우울 속에서 잃어버린 것
"지난 세기"의 '당신'과 단단히 결속된 자가 지금 세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려면 「진화하는 감정」을 보면 된다. 여기서 '침묵하는 당신'을 대타게 부르는 나의 목소리는 나미의 「빙글빙글」에 실려 빗속에 가라앉는 중이다.
오늘은 월요일이고 오늘은 비 내리는 월요일이고 모처럼 비 내리는 월요일 공터 계단참에 앉아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만 보고 있지 (중략) 오늘은 언제 끝나려나 대책 없이 비 내리는 월요일 그저 눈치만 보고 있지 세상은 언제부터 내게 악의를 품어 왔던 걸까 (중략) 월요일이 화요일이 되고 지난 수요일이 되고 지지난해가 되고 십 년 뒤가 되고 까마득해지고 조금씩 사라지는 감정들 아득해진 월요일이 저 빗속으로 투덕투덕 걸어가고 있는데 속만 태우고 있지 (중략) 누구인가 당신은 이 빗속에 서 있는 당신은 악마인가 영혼인가 우리 언제까지 비 내리는 월요일을 살아가야 하나 (중략) 오늘은 월요일이고 오늘은 비 내리는 월요일인데 비 내리는 공터 계단참에 앉아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만 보고 있지 시린 이빨 감추고 빙글빙글 오늘은 월요일이고 비 내리는 월요일이고
-「진화하는 감정」부분
"비 내리는 월요일"은 정지한 시간이다. 정지한 시간은 "지난 세기"를 끝으로 마감된 자가 느끼는 현재의 시간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포섭하며 "꾸깃꾸깃 사라지고"(「僞年輪」) 있는 중이다. "월요일이 화요일이 되고 지난 수요일이 되고 지지난해가 되고 십 년 뒤가 되고 까마득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주체는 "지난 세게"와 맺었던 감정적 결속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렇게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정지한 시간의 세상인 '당신'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시적 주체가 소중한 대상의 상실로 인한 우울과 무기력의 와중에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미의 「빙글빙글」에서 차용한 구절들("그저 눈치만 보고 있지" "속만 태우고 있지" "바라만 보고 있지")은 뒤바뀐 세상에 대한 주체의 무관심과 권태를 표현하기 위해 도입된 시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세계는 나에 대해 무관심했고 나도 세계에 대해 심드렁해져 간다"는 「僞年輪 」의 일절도 세계와의 결속이 해체된 자가 느끼는 소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주체의 우울과 무기력은 "지난 세기"의 "당신"에 대한 애도가 완료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인데, 그 와중에서 주체는 그 누구보다도 길고 험난한 시련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학과 죄의식이 수반되는데, 이것들은 우울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불결"(채은, 「自序」『멜랑콜리』, 2007, p.7.)에 대한 경멸이 있다.
지난 칠년 동안 내가 간신히 확인한 사실이라곤 사랑할 사람이 전혀 남지 않았다는 것뿐 (중략) 자기 스스로 아무 스스럼없이 살아가는 이 세계의 뻔뻔한 냉정과 열정 사이에 잠복한 잘 삭은 경멸 익숙해져야 하는데
-「저개발의 기억」부분
이 시는 "당신을 기쁘게 하던 사람이 어떻게든 상처로 남겨지는 이유"(「결행의 순간」)를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사랑이 부재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없이 굴러가는 세상, 그런 세상의 "뻔뻔한 냉정과 열정"에 대한 시적 주체의 반응은 한마디로 '경멸'이다. 이것은 이중적이다. 조락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경멸과 그러한 세계 속에서 "익숙해져야 하는데"라고 다짐하는 주체의 "잘 삭은 경멸"에 대한 경멸. 전자의 경멸은, 그것이 비록 '창녀'의 것이라 할지라도 시적 주체의 순결성을 반증한다. 조락한 세계에 대한 무관심, 회한, 한탄, 원망, 부정, 회피, 절망, 염오, 분노, 질시, 증오 등이 그렇다. "순수한 증오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숨어 있지"(「결행의 순간」)라는 인식은 "지난 세기"에 대한 시적 주체의 순결한 고착을 예증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멸은 그 양상이 다르다. 예컨대 "참으로 거침없는 비역의 저녁"(「忘記他」)
에 대한 경멸은 "지난 세기"에 대한 순결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세계에 "익숙해져야 하는데"에 담긴 동화에의 요청은 "지난 세기"에 대한 주체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집이 제기하는 궁극적 질문이, 조락한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락한 세계 속의 주체에 대한 것임을 암시한다.
이것이 스스로에게 "내가 잃어버린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금요일의 시작」)라고 질문을 던지는 이유이다. 이는 상실된 세계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차라리 상실된 세계가 그것일 거라는 오인(誤認) 속에서 상실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분명 당신의 잘못이다'라는 단정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무얼이까? 그것은 놀랍게도 '수치심'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동안 나는 수치심을 잃어버렸지"(「Le Paria」)라는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죄를 구성하는 것이 죄의 세목들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들을 통해서 상실되는 주체의 특정 상태라는 것을 문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저지른 죄악을 모두 고백하리라 결심하지 난 아직 용서받지 못했으니까"(「이십세기 소년 독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모두 고백하리라"가 아니라 "고백하리라 결심하지"에서의 '결심'에 있다. '고백에의 결심'은 상실된 수치심에 대한 인정에서부터 싹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세계의 끝"에서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세계의 끝」)고 말한 이유를 해명해 준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자는 수치심을 안고 죽지 않는다. 죄의 고백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죽음을 가능케 한다는 것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 「리튬」은 '당신'에게로 향한 죄의 고백이자, 죽음에의 선언이다.
우리가 깨트린 거울 속에서 아름답습니다 진정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자꾸 아름다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붉어지려 합니다 붉게 피어나고 있습니까 시뻘겋습니다 마침내 시뻘건 피가 흐릅니까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으려 합니다 당신을 만나러 가려 하듯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그립습니까 저는 당신이 그리워지려 합니다 흥분되려 합니다 당신을 죽였습니까 죽였습니다 당신도 살인은 해 봤겠지요 어떤 고통은 잊는 것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스럽습니까 고통은 잊을 때 비로소 피어납니다 비로소 잊힙니까 비로소 피어나고 있습니까 맨드라미가 피고 있습니다 붉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죽은 당신은, 정말 죽었습니까
- 「리튬」부분
이 시는 Nirvana의 노래 「리튬」과 친연 관계가 있다. 당장 제목 "리튬"이 그렇고, 몇몇 가사가 그렇다. "우리가 깨트린 거울"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We've broken out mirrors" "I miss you" "I Love you"에서 차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랫말 "I killed you"가 '자유간접화법'에 의해 "당신을 죽였습니까 죽였습니다 당신도 살인은 해 봤겠지요"로 변형 확장되는 것에 있다. "I killed uou"에서 "당신을 죽였습니까"에 이르는 거리는 만만치 않은데, 이를 횡단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우선 파경破鏡, 즉 "우리가 깨트린 거울"이 필요하다. 이것은 '나'와 '당신'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화, 시 「리튬」의 모듈module은 '나'와 '당신'이라는 깨진 파편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말을 건네는 '나', 질문하는 '당신' 그리고 대답하는 '나'가 하나의 기본 모듈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패턴은 "당신을 죽였습니까"에 이르면 다른 방식으로 변형된다. 내가 건네는 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당신'의 질문이 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을 죽였습니까"라는 질문 속의 "당신"은 질문하는 '당신'이 아니라 대답하는 '나'를 가리킨다. 이것은 '나'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 그리고 '나'는 '당신'과 죽은 자로서 대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마지막 연에서 "죽은 당신은, 정말 죽었습니까"라고 되묻는 것은, 일차적으로 죽었지만 정말 죽지 않은 이런 기이한 상황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지만, 그 기저에는 '나'의 죽음에 대한 '당신'의 인준과 확정에 대한 요청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가 「시인의 말」과 연계된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리튬」의 가사 중 "Cause I've found god"가 「시인의 말」에 이르러서는 "난 神을 찾았다/ 그런데 왜/ 나는 죽지 않는가"로 변형되고 있다. 이것은 Nirvana의 리더 커트 코베인의 자살과 관련이 있다. 그가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는 것과 리튬이 항우울제의 치료제로 쓰인다는 것, 여기에서 가사와 제목의 연결점에 대한 암시를 찾을 수 있다. 이때 핵심은 "당신을 죽였습니까"가 Nlrvana의 노래「리튬」과 채상우의 시「리튬」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자유간접화법이었다면, "난 神을 찾았다"는 노래 「리튬」의 Nirvana와 「시인의 말」의 채상우의 목소리가 다성적으로 교차하는 자유간접화법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것은 노래 「리튬」을 매개로 시「리튬」과 「시인의 말」을 연결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시인은 노랫말 "I killed you"의 '당신'을 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나'라는 등식은 시「리튬」과 「시인의 말」을 연결하는 죽음의 매개항이 된다.
그렇다면 「시인의 말」은 '신'의 발견을 매개로, '당신'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질문이 된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은 양자 사이의 시간적 선후성이 필연적 인과 관계로 전환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왜 '나'의 죽음은 실현되지 않는가? 궁금한 일이다. 만약 시인이 시「리튬」에서처럼 '당신'을 죽였고 「시인의 말」에서처럼 '신'을 발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죽음뿐이지 않은가. 그것은 유예된 것인가? 이는 시적 주체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고백했는데 살아 있다 나는// 끝장났다"(「양생법」).
이 모든 것은 시적 주체가 죽은 시간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살아 있지만 죽은 자이다. 혹은 죽어서 사는 자이다. 죽음에 대한 그의 인식은 매우 강렬하고 처절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미모사처럼 죽은 척이나 해 볼까"(「강철서신」)를 비롯해, 안녕에서 寧 자는 居喪하다라는 뜻"(「死亡遊戱」). "언제 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내 팔과 다리"(「크라잉게임」)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그는 "조금씩 죽어 있는 나를 지켜보는 일"(「시작 메모」)을 통해 "내가 이미 죽었다는 걸"(「Le Paria」) 증명하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시적 주체가 자유간접화법에 의해 벌어진 틈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소환하고, 이를 통해 자기의 죽음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에의 인준에 대한 요청은 주체의 목소리의 영도零度와 타자의 목소리의 무한 수렴을 야기하는 제1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목격한다.
나는 ……의 이지 라이더 ……위를 내달리지 ……을 파먹고 ……을 골라 먹고 ……을 후벼 먹지 나는 ……없인 못 살아 ……이 없는 난 시체지 아니 내가 없는 ……이 시첸가? 여하튼 아무 ……에나 올라타지 올라타서 ……의 등골을 빼먹지 난 일찍이 애인에겐 침을 뱉었고 일곱 번째 애인은 두들겨 팼더랬지 첫사랑이 없으니 그 순서는 아무래도 좋아 나는 다만 ……하지 ……의 이지 라이더니까 (중략) 나는 ……하지 내 ……에는 시체가 따로 없지 과거진행형이다가도 미래형으로 바뀌고 현재형과 과거완료형이 뒤섞이기도 하지 그래서 내 ……하기는 그냥 ……이지 난 ……의 이지 라이더니까 ……하기엔 대상이 없어도 상관없지 (중략) 혼신을 다해 ……해 봐 혼신을 다 해 ……하다 보면 ……이 나고 내가 ……이란 걸 하게 될 거야 그렇다고 ……때문에 인생을 바칠 필요는 없어 인생이 ……이었고 ……이고 ……일 것이니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 ……, ……해 봐
-「Easy Rider」부분
여기서 타자의 목소리가 틈입하는 방식은 질적으로 변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텍스트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부재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우선 시 「Easy Rider」는 영화 「Easy Rider」의 차용이다. 그런데 영화의 이미지나 대사가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영화 「Easy Rider」가 영화의 내용과는 다른 차원에서 차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재밌는 것은 그가 제시한 '텍스트' 출처의 목록에는 해석의 방향을 지시하는 '별'이 하나 있다는 사실이다. 즉, "미국 남부에서는 "*기둥서방'이라는 뜻의 은어로 쓰임" 만약 그가 영화 「Easy Rider」를 차용한 의도가 '기둥서방'이라는 의미를 보여 주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시 「Easy Rider」가 사랑과 배신, 그리고 연인에의 기생과 착취를 중심으로 주조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영화 「Easy Rider」는 시의 표면이 아니라 시의 배면에 올라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를 다시 소환할 필요를 느낀다. 진술했듯 「알 수 없어요」가 시에 차용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부재하는 님' 자체의 소환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실질적 내용을 보여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님의 존재 방식'의 소환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텍스트 내적 구현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영화「Easy Rider」의 차용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띤다. '기둥서방'이 전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후자는? 그것은 '말줄임표'에 있다. 말줄임표는 "창조하지만 침묵하는 신"이 텍스트에 편재하는 방식이다.
가능성의 차원에서 말줄임표에 기입할 수 있는 목소리는 무한대에 가깝다. 말줄임표에 쉽게 올라탈 수 있는 '기둥서방'들은 무수히 많다. 게다가 말줄임표의 침묵은 숱한 '기둥서방'들이 쉽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우리는 독자들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다성성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적 주체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따라서 말줄임표는 타자의 목소리가 무한대로 팽창한 자유간접화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 이 시에 불려온 여섯 개의 흑점은 가능성의 표징들"(장석원,「필경, 필경」채상우, 『리튬』, )이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위의 말줄임표가 '기둥서방'이라는 자장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단서를 붙여 둘 필요가 있다. 말줄임표는 '기둥서방'이라는 통합체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특정의 계열체인 것이다. "여섯 개의 흑점" 위에 올라타서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핵심은 말줄임표에 들어올 무한의 계열체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핵심은 말줄임표에 들어올 무한의 계열체가 '기둥서방'이라는, 통합체와 만날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를 확인하는 데 있다.
크게 두 가지로 계열이 있다. "나는 ……의 이지 라이더"와 "나는 다만 ……하지"의 계열체. 양자는 서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우리는 양자가 겹쳐질 때 가장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전자의 계열은 과거에 의해 규유ㅠㄹ된 현재의 특정 대상을 지시할 때 가장 안정적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여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은 '당신'이다. 곧 이별한 연인으로서 '당신', 또 분열된 자아로서 '당신', 조락한 세상으로서 '당신', 따라서 첫 번째 계열은 '나는 '당신'(연인, 자아, 세계)'의 이지 라이더로 정식화될 수 있다. 후자의 계열은 '당신'에 대한 감정과 태도를 표상하는 단어가 올 때 가장 안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확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경멸일 수도, 증오일 수도, 사랑일 수도 있다. 더불어 양자의 교집합, 즉 대상이면서 동시에 감정 및 태도를 표상하는 단어를 확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주체의 선택에 따라 교집합의 외연이 달라질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과 태도가 과거의 시간에 매여 있다면, 교집합은 멜랑콜리의 범주 내에 있을 것이다. 이때 말줄임표는 "비명의 기원"(채은, 「멜랑콜리」, 『멜랑콜리』, p.11.)에서 흘러나오는 여섯 방울의 '검은 담즙'이 된다. 그러나 만약 '나'의 감정과 태도가 과거의 시간을 벗어나 미래의 시간에 다가올 어떤 가능성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면, 교집합의 범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때 말줄임표는 조락한 세계의 우울을 횡단하는 '여섯 개의 발자국'이 된다.
①
자꾸자꾸 하하하 자꾸자꾸 걸어 나가면 정말 정말 이 세상을 다 건널 수 있을까 아직 완성하지 못한 발걸음
-「자꾸자꾸 걸어 나가면」부분
②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시작되자마자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사라지면서 시작되고자 한다
몰래 피어나 버린 꽃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시작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전격적으로 매일매일
사라지면서 시작되려 한다 그것은
너에게도 죽을 마음이 남아 있는가
나무가 제 그림자 속에 뼈를 감추듯
사라지면서 시작되고 있는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전문
이 조악하고 조락한 세상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것은 「자꾸자꾸 걸어 나가면」에서 "이 세상을 다 건널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한 해답은 있는가? 모를 일이다. 다만 반성이 있을 뿐이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반성들", 그것은 '당신'에 대한 재사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죽어도 죽지 않는 당신 당신을 가까스로 깨닫기 시작한 나"(「검은 기억 위의 검은 기억」)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것이 갖는 함의는 두 번째 시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에 잘 나타나 있다. "시작되자마자 사라지고 있다"에 암시된 것은 "영원한 패배"(장석원, 앞의글, p.118. "끝나지 않은, 기록하지 못한 이십세기.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영원한, 이십세기, 우리를 피에 굶주리게 하는, 저 영원한 패배의, 이십세기, 개 같은 이십세기. 이십의 세기야, 이 씹의 새끼야, 이 씹 새끼야. 내가 패배했다. 망령들, 나를 지배하라.")인가? 그렇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사라지면서 시작되고자 한다"가 움튼다. 아직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시작되고자 하는 의지와 기미가 싹을 틔우고 있다. 이것은 죽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의 불가능성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결심했었던 모든 결심들을 새삼 결심하고 한다"(「天長地久」)와 같은 의지의 주체가 탄생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러니 이 '결심'이야말로 "불탄 마음"(塵心)에서 마음을 다한(盡心) 자만이 얻은 수 있는 '진심(眞心)이 아니겠는가?
4. 나는 결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채상우의 시편들에 내재한 목소리들의 다성성과 혼종성은 그 폭과 깊이가 남다르다. 무수한 텍스트들이 들며 나는 중에 발화하는 소리들의 자취는 무수한 가닥과 갈림으로 분기되어 복잡하고 다단하다. 다양한 밯화가 섞이고 중첩되는 와중에, 텍스트들은 새로운 의미들을 분만하고 무수한 파생적 의미들을 출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시편들은 기존 전통시가 견지해 왔던 시적 자아의 자기동일성을 해체하고 있다. 목소리들의 다양성과 혼종성이 시적 자아와 세계의 유기적 총체성에 균열을 가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이행'에 있어 채상우의 시는 단연 선봉에 서 있다.
채상우의 시에서 자유간접화법은 다성적 목소리들이 들고 나는 현장을 채록한다. 그의 자유간접화법은 확산하는 소리에 따라 산포되는 의미들을 포집하는 시적 장치이다. 이때 우리는 타자의 목소리가 시적 주체 안으로 수렴되면서 특정한 방향성을 띠는 현상을 발견한다. 무수한 타자의 노래들이 '당신의 목소리'로 수렴되는 현상, 장황한 산문시가 유려한 리듬으로 읽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당신'의 존재 때문이다. 이는 다성적 목소리가 기저 층위에서 하나의 소리의 톤tone과 의미의 결 texture에 의해 주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부재하는 당신'을 대면하는 시적 주체의 '멜랑콜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자유간접화법은 혼성모방pastiche과 지향점이 다르다. 혼성모방이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바우는 빙의憑依의 작업에 빗댈 수 있다면, 자유간접화법은 "창조하지만 침묵하는 신"에 이르기 위해 자기의 목소리를 구성해 가는 연금술의 작업에 빗댈 수 있다.
따라서 자유간접화법의 주체는 텍스트의 무당이 아니다. 차라리 텍스트의 화학자라고 해야 옳다. 그는 '당신'이라는 원소의 시학을 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텍스트의 주기율표를 궝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리튬'이라는 죽음의 원소에 이르러 '결심의 주체'로 승화하여 새로운 '진심'의 세계를 개시하고 있다. 그 세계는 '리튬'처럼 가볍겠지만, 축전지처럼 동력으로 전환될 무한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렇다. 그의 '리튬'은 '결심'으로 충전되었다. 이것이 어디에 쓰일지는 아직은 모를 일이다. 여전히 '멜랑콜리'로 방전될 것인지, 아니면 '당신'을 재사유하는 혁명의 '기름'이 될지는 글쎄, '나는 아직, 알 수 없어요'.(이문세「나는 아직 모르잖아요」한용운,「알 수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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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비평선 001『돔덴의 시간』, 2017. 2. 28.<(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펴냄
* 장철환/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 『현대시』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주요저서로 『김소월 시의 리듬 연구』,『영원한 시작』(공저),『이상 문학의 재인식』(공저), 『라깡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공역)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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