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인石人
유종인
베란다 밖 저 아래에 작은 바위가 있네
작업복 차림의 여름 사내가
급히 핸드폰을 받다 밀짚모자를 바위에 내려놓고 가네
어쩐 일인가
바위는 그때부터 나를 부르는 듯해
그가 여승女僧인가 싶다가도
몇 달 전 사별한 홀몸의 가을인가도 싶네
오래도록 뿌리 깊었으나
이제 그 뿌리에서 시린 강물 소리도 들리네
같이 가자구요 우리
먹먹한 가슴으로 일단 십 리十里만 뜨자 하네
아니 오 리五里쯤 가 버드나무 그늘 밑에
서로의 낯에 돋은 쓸쓸한 별을 더듬자네
세상은 다 집을 얻어 사랑을 들어앉히는데
밀짚모자를 눌러쓴 바위는
들판에 쓰러진 나무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어느 거룻배에 올라 손으로 강물 저어 가자 하네
사랑이 어디까지냐구요 어디까지인지
그걸 다 말하는 건 무엇이나 오류라네
한끝 간곡히 바위에게 묻으니,
죽음은 앞서 끝났고 사랑은 늦깎이라 이제 시작이라네
-전문-
해설> 한 문장: "늦깎이"라고 고백하는 이 사랑은 아마도 전보다 깊고 그윽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견고한 병동을 해체하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어느 산문에 언급한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많은 소금을 품고도 바다는 한 번도 소금의 맛을 탓하지 않는다."(『염전』, 눌와, 2007, 279쪽) 바다는 소금을 품고 있지만 맛을 변하게 하지 않는다. 숲을 헤매는 사내의 번뇌는 기억이라는 염전에서 생성된 소금과 흡사하다. 질척거리는 욕망과 훼손된 관계들로 얼룩진 세계의 창살을 허물 수 있는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나'를 괴롭히는 온갖 상념들은 생명이 가득한 숲에 조금씩 녹아들고 스며들고 마침내 '나'는 상념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세계를 부정하는 예민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유종인의 시 세계는 시간과 생명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힘겹게 나아가는 중이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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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숲시집』에서/ 2017. 6. 30. <(주)문학수첩> 펴냄
* 유종인/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2003년《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부문, 2011년《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시집『사랑이라는 재촉들』『수수밭 전별기』등, 시조집『얼굴을 더듬다』, 미술 에세이『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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