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이슬 프로젝트-24

검지 정숙자 2017. 7. 23. 15:36

 

 

    이슬 프로젝트-24

 

    정숙자

 

 

  비둘기도 인생관// 조류의 지능을 빗대어 흔히 '새대가리'라고들 하지

만, 그건 좀 회의적이다. 적어도 조류의 시간개념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

허한다. 문명 이전부터 정확히 새벽을 알려준 이도 덕금德禽이요, 편지

를 전해준 이도 전서구傳書鳩가 아니던가.

 

  나는 요즘에도 여전히 일몰 두 시간 전쯤이면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책을 읽는다. 이제는 발에도 눈이 생겨 전혀 위험하지 않다. 공터 부근에

이르면 으레 비둘기 몇 마리가 필필필필 날갯소리를 내며 마중 나온다.

그건 쌀보리 한 주먹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걔네들 자존심이

만만찮다. 자기들의 시계에서 5분만 늦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필히 땅

거미가 얼씬도 하지 않는 시각이라야 만날 수 있다. 아무리 달콤한 낟알

이라도 자존심과는 바꿀 수 없다는 셈이겠지.

 

  하지만 나에게도 사정이 생길 수 있는 거 아닌가. 그 무정이 처음에는

서운하기도 괘씸키도 했다. 너희들만 자존심 있니? 매일 챙겨오는 줄 뻔

히 알면서 그새를 못 기다려? 그런 허무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그 여간내

기 아닌 지조가 귀감으로 간직되고는 한다.

 

  "얘들아 비둘기 만지지 마." 세 번이나 들려온다.비둘기를 목각쯤으로

여기는지. 겨우 걸음마 떼는 어린 것에게 비둘기를 만지지 말라니! 어림

없는 어림수다. 걔네들이 우두커니 잡힐 줄 아시는가? 참 환한 엄마들,

21세기 앞장들이 대체 비둘기를 뭐로 알고.

 

   _ and _

 

  무라카미 하루키『상실의 시대』86쪽, 마침표 하나가 움직인다. 가만 보

니 정말 마침표가 맞다. 그런데 이동력이 수상하지 않은가. 나는 둘째손

가락 끝에 살짝 힘을 실으며 사선을 매겼다. 순식간에 마침표가 폭1㎜,

길이 1㎝ 정도의 갈색 선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다시 그 책을 폈다. 마침표의 무덤이자 육체의 증거인 갈색 선을

바라보며 삼우제를 대신하는 중이다. 그저께 있었던 일이니까. 이렇게도

깨끗한 마감! 그것도 책 위에서,["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저기서

어쩌다가 동행이 생기기도 했지만."]/  

   -전문-

 

   * 블로그주: 끝 행, "동행"의 "행"자 위로 그어진 사선, 책에서 확인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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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2017-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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