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
정숙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한시도 쉬지 않고
발목 깊은 섬들을 높이 세우고
자신도 모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미지를 목표로
무작정 가보는 것일까
아닐 거야. 내 눈엔 안 보이지만 그는 정확히 가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치밀히- 꾸준히 갈 수가 있지? 절대로 눈물에 빠질 리도 없어. 그는 이미 온몸이 눈물로 채워졌으니,
모두들 섬이라 부르지만 저건 섬이 아니라 돛이야
46억 년 동안이나 범선의 항해를 도운,
비트적대거나 비굴을 모르는,
방향과 푯대이지
바다는 오래 전에 지구를 지나갔을 거야. 지구에 담겨 있대서 지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지. 저렇게 열심히- 치밀히- 꾸준히 저어온 노정이 얼만데 여태 제자리걸음이겠어? 저 출렁거림은 여운이야.
절망은 코드가 될 수 없다
'혹은'이나 외로움은 멀리 묻는다
실천만이 언어다
바다는 다쳤을 거야 심각하리만치 여러 번
최후의 통용화폐란 언어가 아닌 행위라는 걸 자각했겠지
오늘 밤에도 더 많은 섬들이 솟을지 몰라
범선은 돛을 펴고 가야 하니까
저간에 잃어버린 순수를 찾아
아주 멀리 가야 하니까
맑고 따뜻한 진실과 신뢰의 별에 범선이 정박하는 날
인류세, 해양은 마른 바닥만 붉어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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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실』2017-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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