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의 여름
김유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기.
다섯 번째 돌고 있는 소방서
버스 정류장 앞 5층 건물
바람이 흔드는 공원 플라타너스 이파리
그늘을 좋아하지.
아이스크림 가게 그늘막이나 동네 슈퍼 파라솔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검은 열기는
떠도는 나를 녹일 듯 타오르고
보도블록에 발바닥을 덴 적 있지.
달리던 택시가 연기를 토하는 것 보았어.
8월인 거야.
아이가 얼음이 가장 빨리 녹는 달이라고 했지.
나에게 허락된 것은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기.
-전문-
해설> 한 문장: 위의 작품의 화자는 초록 들판이 없는 뜨거운 "8월"의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늘에서 그늘로 옯겨 다니기"일 뿐이라고 자조한다. 그리하여 "다섯 번째 돌고 있는 소방서"나 "버스 정류장 앞 5층 건물"이 아니라 "바람이 흔드는 공원 플라타너스 이파리/ 그늘을 좋아하"고 있다. 화자는 더위를 식히려고 "아이스크름 가게 그늘막이나 동네 슈퍼 파라솔"에 들어가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는 더위를 제대로 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검은 열기"가 "떠도는 나를 녹일 듯 타오르"는 바람에 "보도블록에 발바닥을 덴 적"이 있었다. "달리던 택시가 연기를 토하는" 장면도 보았다./ 수많은 인구가 도시 단위와 생산 단위로 편입되면서 가족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주택 문제, 식수 문제, 도로 문제, 안전 문제, 환경 문제 등이 대두되었다. 노동자 계급과 산업 부르주아 계급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기존의 왕족 및 귀족 계급의 지배 체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계급 갈등은 물론 임금 문제, 노동 문제 등도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화자는 "아이스크림 가게"나 "슈퍼"마켓이 제공하는 "그늘"이 아니라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제공하는 "그늘"을 선택했다. 도시의 건물이 아니라 초록 생명체가 들어 있는 나무를 동반자로 삼은 것이다./ 이렇듯 화자는 "나무의 공간적인 구조가 그의 시간적인 구조를 잊어버리게 할 순 없음"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활엽수나 낙엽수들의 편에서 보자면, 시간의 차원은 특별한 존재 - 나무 - 의 변신을 통해서 생과 사의 우주적 놀이를 모범적으로 그려 보여주는 계절의 반복된 주기 속에 씌어 있다. 발아에서 개화까지, 신록에서 잎새들의 추락까지 나무의 변신은 인간의 눈에 시간의 경과를 교향악으로 들려"(로베르 뒤마,「나무의 철학」, 동문선, 2004, 41쪽.)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적국의 여름"이라는 시간을 우주의 종소리를 들려주는 "플라타너스 이파리"의 시간으로 이겨내고 있다.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도시 공간에 함몰되지 않고 우주가 제공하는 시간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맹문재/ 문학평론가, 안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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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지구의 살점이 보이는 거리』에서/ 2016.11.10. <서정시학> 펴냄
* 김유섭/ 경남 남해 출생, 2011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찬란한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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